시와 영화, 그리고 시적 영화

장가영 | 기사승인 2020/01/09 [17:02]

시와 영화, 그리고 시적 영화

장가영 | 입력 : 2020/01/09 [17:02]

▲ '라라랜드' 스틸컷.  © 씨네리와인드



[씨네리와인드|장가영 리뷰어] 시와 영화는 그 본질에 있어 상당한 유사성을 느낄 수가 있다. 시인의 경우에는 글 언어를, 영화감독의 경우에는 영상과 소리를 통해 폭발성이 있는 감각을 꼭꼭 눌러 담은 하나의 도시락 같은 작품을 일구어낸다. 그리고 예술가와 작품, 그 작품을 향유하는 사람이 무게중심에서 영혼으로 만날 때 감각이 폭발하고 향유자는 그 감각을 오롯이 맞는다. 시는 길지 않고, 영화는 길지만 ‘엔딩’이 있기 때문에 폭발성이 있는 감각이라는 표현을 썼다. 아무리 대단한 영화라고 한들 엔딩의 임팩트가 없으면 감각은 완전히 폭발하지 않은 채 뭉근함 정도만 남기게 된다. 물론 이 뭉근함이 더 가슴 저린 여운으로 새겨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영화의 엔딩 장면은 단순한 끝맺음이 아닌 영화 전체의 집약이라는 점에서 한 꺼풀 더 벗겨볼 필요가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비슷하게 멋진 엔딩을 가진 영화로 <조찬클럽>, <트루먼 쇼>, <쇼생크 탈출> 등이 있고 비교적 최근 영화중에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라라랜드>가, 한국영화 중에는 <살인의 추억>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조찬클럽> 같은 경우에는 명성에 비해 다소 심심하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엔딩이 훌륭했기 때문에 지금껏 회자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엔딩이 훌륭하다는 것은 시로 환원하면 뇌리에 남는 구절이 있느냐와 비슷한 차이를 만든다. 이를테면 <최승자 - Y를 위해서>의 ‘오 개새끼/ 못잊어!’나 <백석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등이 뇌리에 남는 구절의 예시다. ‘오 개새끼/ 못잊어!’는 어쩌다가 최승자 시인까지 잊어버리게 되더라도 못 잊을 구절이며, ‘응앙응앙’ 또한 그렇다. 백석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학창시절 한 번쯤 ‘응앙응앙’을 장난스럽게 뇌까려 본 기억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좋아한 시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는 구절을 아직도 툭 치면 나올 정도로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남는 구절의 힘을 안다. 반면에 못지않게 좋아했던 또 다른 시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시선을 확 끄는 구절이 없었고, 따라서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읽을 때 소모되는 감정의 크기에 차이가 있었다.

 

앞서 밝혔듯이 엔딩이 꼭 충격적으로 좋거나 눈에 띄는 구절이 무조건 있어야만 좋은 영화, 시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와 시가 공통적으로 담을 수 있는 집약적인 감각을 최대로, 폭발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지표로 각 대상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집약적 감각을 폭발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은 시와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등장한 시기에서도, 향유층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영화와 시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면에서는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유사점이 나타나는 데에 영향을 줬으리라. 예술의 다양한 장르인 조각, 회화, 음악, 소설, 연극 등을 생각해보더라도 위와 같은 유사점에 있어 가장 맞닿아 있는 장르는 시와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조각과 회화는 시와 영화에 비해 훨씬 압축적이다. 소설은 설명과 묘사가 많고, 연극은 시와 영화 사이 즈음에 있는듯한데 오히려 그래서 상상력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이 좁으며, 음악은 예술가가 가지고 있는 감각을 이미 폭발시켜 들려주는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표현에 제한이 없어 확장 가능성이 그 자체로 무한한 시와 영화가 감각적인 면에서는 가장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 같다.

 

한편, <현대시론>이라는 시론 교재에서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있는데 시와 영화가 어떻게 만나는가에 대해 살펴보며 시를 소개하는 부분을 인용한다.

 

시는 예로부터 최고급의 예술을 뜻하는 상징적인 표지였다. 시인들은 탈속적이며 고결한 위치에서 모든 것을 노래할 수 있다는 권능과 초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인 경험의 세계마저 마음껏 주유할 수 있는 신비적 영감을 부여받았다. 물론 오늘날 과학적인 이성의 힘은 뮤즈의 성스러운 신역에까지 뻗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생의 아름다운 빛과 사색의 심연과 세계의 진정성을 향유하고자 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여전히 애호되고 있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시적 조각이니 시적 연극이니 시적 발레니 하는 등의 표현에서 보듯이, 모든 예술의 영역에서 ‘시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 이 경우는 그 영역에서 적어도 가장 고급스럽고 수려하고 영예로운 경지에 상응하는 작품성의 가치에 도달하였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영화의 경우에 있어서도, 시적 영화니 영상시인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시와 영화는 빼 닮았다. 비유컨대, 시는 말하는 그림이며, 영화는 눈에 보이는 시이다.

 

▲ '팀 버튼' 영화감독.  © 씨네리와인드



히 영상시인으로 불리는 감독으로는 타르콥스키, 앙겔로플로스 등이 있다. 그리고 ‘고딕의 영상시인’이 하나의 엠블럼처럼 붙어 다니는 팀 버튼이 떠오른다. 팀 버튼에 한정지어 이야기 해보자면, ‘고딕의 영상시인‘이라는 말은 느낌으로는 확실히 전달이 되지만 고딕이 미술 양식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특이한 표현이다. ’고딕‘과 ’영상‘, ’시‘가 결합된 이 표현은 영화가 나타낼 수 있는 복합적 층위의 예술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한다. 팀 버튼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감독이지만, 팀 버튼에게 붙은 ‘시인’이라는 표현이 고급스럽고 수려하고 영예로운 경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팀 버튼은 소위 B급 감성을 표방하는 감독이다. 작품이나 인터뷰 등을 보면 팀 버튼이 기괴한 것, 괴짜스럽고 어그러지고 모자란 이미지를 좋아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팀 버튼은 <비틀쥬스>나 <화성침공>, <가위손>, <유령신부> 등 사실상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에 그런 존재들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영화적인 연출에도 ‘모자란 이미지’와 비슷한 ‘틈‘을 알게 모르게 끼워 넣는다. ’틈‘을 끼워 넣는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에드 우드>를 보면 영화 중간 중간 마치 어린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들뜨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 팀 버튼의 영화는 유치함과 순수함, 끔찍함과 아름다움 사이 어디쯤 머물면서 새로운, 날카로운 감각을 잃지 않고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물론 실패할 때도 있다) 꽉꽉 완벽하게 짜인 장인의 영화라기보다는 개성 있는 영화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팀 버튼이 영상시인이라고 불릴까? 영화가 시적으로 느껴지거나, 감독이 영상시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어쩌면 고매함, 완벽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개인적으로-이렇게 말하면 상당히 편협하게 느껴지지만-프랑스 영화 특유의 감성을 시적이라고 느낀다. 미셸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 <수면의 과학> 이나 장 피에르 주네의 <아멜리에>, 그리고 방금 언급된 영화들과는 좀 다른 느낌이지만 <퐁네프의 연인들>이 또한 그렇다. <무드 인디고>, <수면의 과학>, <아멜리에>는 모두 내가 생각하는 프랑스 영화 특유의 감성을 보여주는 대표격 영화들이다.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벗어나 있고 꿈꾸는 듯한 이미지로 진행되지만 어딘가 모르게 현실과 겹쳐지면서 더욱 기묘한 느낌을 준다. 처음으로 본 프랑스 영화가 <아멜리에>인데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멍한 상태였던 것이 기억이 난다. <퐁네프의 연인들>까지 함께 생각해보면 ‘날이미지’와 ‘구체성’이라는 다소 시적인 특성들이 떠오른다. 날 것의 이미지가 계속 튀어나와 관객을 당황시키면서도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메시지와 디테일을 담고 있는 영화가 많은 만큼, 프랑스 영화는 시적인 감성을 담고 있다고 은연  중에 생각해왔던 것 같다. 

 

반면 우디 앨런의 영화 <멜린다 앤 멜린다> <카페 소사이어티> <로마 위드 러브> <미드나잇 인 파리> 등은 연극 같은 영화라고 느꼈다. 기준이 모호하긴 하지만 내용과는 관계없이 구성이 좀 더 포괄적이고 트여 있으며 이미지가 생생한 영화를 시적이라고 느끼고, 반대로 구성이 꽉꽉 짜여있고 이미지가 다소 인위적인 영화를 연극 같다고 느끼는 듯하다. 시가 그 자체로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는 데에 반해, 연극은 배경이나 인물, 플롯 등에 어느 정도 제한이 걸려있다는 것이 아마 이유일 것이다. 연출을 통해 영화를 시적으로도, 연극적으로도 보여줄 수 있으니 영화감독을 마법사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동일 감독의 작품이어도 시 같은 작품이 있고 연극 같은 작품이 있다. 예를 들어 잉마르 베르히만의 <페르소나>는 시적인 느낌이 강하고, <가을 소나타>는 연극적인 느낌이 강하다. 둘 다 특정한 공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만큼 연극처럼 배경이 한정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페르소나>는 그것을 뛰어넘는 연출과 내용을 보여준다. 반면 <가을 소나타>는 대사라든지 카메라 활용에 있어서 답답하게 느끼도록 감독이 의도하여 순간의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따라서 <페르소나> 정도의 정신적 도약은 없지만 관객이 배우들의 연기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으며 메시지를 명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시적 영화와 연극적 영화는 서로 다른 매력과 주안점이 있으며 시적 영화를 무조건 최고라는 식으로 추앙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를 시적이라고 합리화하는 것인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처음으로 본 프랑스 영화가 <아멜리에>였는데 이야기 전개가 상당히 특이했고,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는 부분도 흔히 접할 수 있는 할리우드식 영화와 너무 달랐기 때문에 한동안 충격으로 얼이 빠져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이, 어떻게 보면 엉망진창으로까지 보이는 부분들이 일상 지각을 넘어 생각할 수 있는 지표를 넓혀주고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피부로 감정이 와 닿는 할리우드식 영화가 아니라 특이하거나 어려운 영화를 보고 시적인 영화라고 스스로 판단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팀 버튼을 보고 고딕의 영상시인이라고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팀 버튼은 과거 디즈니 소속이었으나 추구하는 바가 달라 디즈니를 나온 감독이다. 디즈니가 사랑하는 것은 공주와 왕자, ‘happily ever after‘이다. 기분 좋은 이야기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기만적으로도 보인다. ’예쁘고 잘생긴 공주와 왕자가 행복하기만 하면 다냐?‘ 라는 질문으로 디즈니는 아직까지 비판받으며, 변화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지금껏 디즈니가 지어 온 ’강박적 왕국‘이 여전히 건재한 만큼 꾸준한 비판도 불가피한 일이다. 그런데 팀 버튼이 만든 첫 단편은 괴짜 소년의 무섭고 끔찍한 상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후 제작한 첫 장편은 괴짜 소년이 죽은 반려견을 살리기 위해 반려견을 무덤에서 파내고 번개를 맞게 해서 끔찍한 모습으로 살려낸다는 내용이다. 각각 <빈센트>와 <프랑켄위니>의 뼈대인데, 내용만 봤을 때는 디즈니스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대체 무슨 일이야‘라는 생각까지 든다. 물론 삽화까지 함께 보면 충격과 공포는 2배가 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팀 버튼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흔히 끔찍한 것들이 더 이상 끔찍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스럽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령신부>에서 저승과 이승을 표현하는 방식을 보면 기존의 인식을 뒤집어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승은 축축하고 어둡게, 저승은 화려하고 밝게 그려져 있으며 각 세계에 사는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외적으로 봤을 때는 저승에 사는 인물들이 더 징그럽지만, 꼴 보기 싫은 쪽은 이승의 눅눅한 사람들이다.

 

또, <가위손>을 보면 주인공 에드워드는 끔찍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손에 가위만 달린 것이 아니라 얼굴이 상처로 가득하고 사회성도 부족한 에드워드가 영화의 주인공인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에 에드워드는 보통 사람이 가지지 못한 순수함을 가지고 있고, 특별한 능력을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꿈같은 경험을 선사한다. <비틀 쥬스>, <빅 피쉬>의 주인공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끔찍하다고 흔히 생각하는 것들을 유쾌하고 발랄하게, 순수하고 사랑스럽게 그려내는 것이 팀 버튼 영화의 특징이다. 외적인 면이나 내적인 면에서 조미를 가하는 것도 아닌데 팀 버튼 영화 속의 괴짜들을 보면 관객은 울고 웃을 수밖에 없다. 또한 미장센이나 연출적인 면에서 팀 버튼은 리얼리즘을 확연하게 부숴 버린다. 주로 건물이라든지, 등장인물의 모습 등으로 리얼리즘의 파편화가 표현된다. 그래서 오프닝만 봐도 팀 버튼 영화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만큼 이 모든 개성적 특징이 개연적으로 연결되어 팀 버튼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 분위기 속에서 관객은 일상지각의 파괴, 지각 영역의 확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까 발췌한 교재의 내용과 같이 최고급의 예술을 뜻하는 상징적 표지로 ‘시적이다’가 사용되는 것에 대한 회의적 시선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다양한 장르가 시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고전이 최고다’라는 인식이 아직도 팽배한 만큼 뿌리를 찾고자하는 회귀 본능에서 그런 말이 사용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적인 것은 곧 최고급인 것이라는 생각이 지금도 유효하거나 유용한 개념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예술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최후의 도달점은 비슷할지 몰라도 그 곳으로 향하는 과정 자체가 예술 하나하나의 장르적 특이성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서는 시가 오히려 시에서 뻗어 나간 다른 장르와 전도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상당히 많기 때문에 최고급의 예술을 뜻하는 말로 ‘시적이다’를 붙이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소 뒤처진 개념으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따라서 예술과 예술의 관계성은 질적 고저의 관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수평적 시선에서 어느 부분이 맞닿아 있는지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은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보도자료 및 제보cinerewind@cinerewind.com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