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특별한 ‘소녀의 세계’

순정 백합 학원물 ‘나팔꽃과 카세씨’와 ‘플래그타임’

김준모 | 기사승인 2020/05/21 [15:06]

조금은 특별한 ‘소녀의 세계’

순정 백합 학원물 ‘나팔꽃과 카세씨’와 ‘플래그타임’

김준모 | 입력 : 2020/05/21 [15:06]

[씨네리와인드|김준모 기자] 일본 만화책을 보면 표지에 꽃이 강조된 작품이 있다. 남성이 중심이 된 표지에는 장미가, 여성이 중심인 표지는 백합이 그려져 있다. 이는 일본잡지 ‘장미물’의 편집장 이토 후미마나부가 ‘남성의 사랑이 장미라면 여자는 백합이다’고 말한 데에서 비롯된다. ‘백합물’은 여성 사이의 사랑을 다룬 장르를 지칭하는 단어다. 예전의 백합물이 남성에게 보여주기 위한 여성의 사랑을 다뤘다면 최근에는 사춘기 소녀의 우정과 애정에 중점을 둔다.

 

라이트노벨의 대중화는 백합물을 그들의 공식에 맞춰 표현한다. 순정 학원물에 백합물의 색을 더하며 보다 섬세하면서도 특별한 소녀의 세계를 그린다. 순정 학원물이 표현하는 감정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순정이다. 첫사랑에 빠지고 설레는 연애를 시작한다. 고백의 순간 느껴지는 떨리는 감정이나 첫 데이트에서의 수줍음과 어색함, 처음 경험하는 사랑의 즐거움은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소중한 첫사랑의 순간을 그린다.

 

두 번째는 불안이다. 처음 사랑을 시작하면 그 감정에 불안을 느낀다. 이 감정이 진짜 사랑인지, 혹 내가 사랑에 있어서 실수를 하고 있는 게 아닌지. 사랑을 가볍고 편하게, 한마디로 인스턴트처럼 생각하지 않고 생애 가장 진중하고 중요한 순간으로 여기기에 감정에 있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확인하고자 한다. 내 소중한 감정이 상처받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상대의 모습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경향을 보인다.

 

세 번째는 환희다. 순정 학원물이 환희를 자아내는 건 첫사랑은 이뤄질 수 없기에, 그래서 이뤄주고 싶은 마음에 더 감정을 자아내는 게 아닌가 싶다. 사소한 문제로 갈등을 겪고 서로를 향한 지나친 배려 때문에 감정을 숨기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사랑에 어수룩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의 섬세한 마음이 이어지고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순간 커다란 기쁨인 환희는 이뤄진다.

 

▲ '나팔꽃과 카세씨' 스틸컷  © (주)얼리버드픽쳐스

 

‘나팔꽃과 카세씨’와 ‘플래그타임’은 순정 백합 학원물의 매력을 보여준다. 만화 원작의 두 작품은 사토 타쿠야 감독에 의해 각자의 뚜렷한 색을 보여준다. ‘나팔꽃과 카세씨’가 모에화 그림체에 청량한 느낌을 주는 애니메이션이라면 ‘플래그타임’은 더 섬세하고 깊은 갈등을 지닌 성장 학원물의 매력을 선보인다. ‘나팔꽃과 카세씨’는 로맨스물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성향의 두 주인공을 내세운다.

 

원예부인 야마다는 수줍음 많은 성격이지만 성실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다. 자그마한 키에 귀여운 외모, 당황할 때면 머리에서 풀이 피어나는 야마다의 모습은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대세라 할 수 있는 모에화 그림체 캐릭터의 정석이다. 반면 카세는 큰 키에 보이시한 매력을 지닌다. 빼어난 외모와 성격도 운동실력도 탑인 카세는 여고 최고의 인기인이다. 두 사람은 버스정류장에서 사랑을 확인하고 사귀는 사이가 된다.

 

첫사랑은 삐꺽거리기 마련이다. 사랑을 한 적 없기에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는 건 물론 책이나 드라마를 많이 봤다 한들 사람은 모두 다르기에 내 감정을 표현하면서 상대의 감정을 알아주는 게 쉽지 않다. 야마다는 카세가 혹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까 배려하려고만 하고 카세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상과 야마다와의 사랑 사이의 균형을 맞추지 못해 애를 먹는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소한 일로 오해하기도 하고 속으로 앓기도 한다.

 

▲ '나팔꽃과 카세씨' 스틸컷  © (주)얼리버드픽쳐스

 

두 사람의 모습은 첫사랑의 때를 떠올리게 하는 마법을 선사한다. 남몰래 학교 옥상에서 꽃밭을 가꾸는 야마다의 모습을 바라본 카세나 카세를 배려하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지 못하는 야마다는 답답하고 어리숙하지만 소중했던 첫사랑의 모습 그대로다. 백합물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에 더 섬세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보통의 학원 로맨스의 경우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의 공식을 보인다.

 

남자는 방황하고 배회하며 여주인공을 사랑한다 말하지만 온전히 마음을 주지 못한다. 불처럼 사랑을 내뱉기만 할뿐 어리고 서투른 모습을 보인다. 반면 여자는 남자를 곁에서 돌보고 그의 모든 감정을 안아주고자 한다. 남주인공이 확신을 지니고 마음을 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비록 한두 번의 방황은 있을지언정 언제든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처럼 늘 같은 자리에 서 있고 마음의 문을 닫지 않는다.

 

반면 백합물은 두 주인공이 모두 섬세하다. 이런 섬세함이 잘 나타나는 장면이 목욕탕 장면이다. 여행에서 야마다와 카세는 우연히 같이 온천에서 만나게 된다. 육상부라 친구들과 함께 목욕하는 게 익숙한 카세는 갈등한다. 야마다 앞에서 옷을 벗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야마다를 어색하게 여기고 벗지 않는 게 이상한 건지 말이다. 이는 야마다 역시 마찬가지다. 갑작스런 카세의 등장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되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회로가 정지해 버린다.

 

▲ '플래그타임' 스틸컷  © (주)얼리버드픽쳐스

 

이런 섬세함은 기존 순정 학원물과는 다른 감정의 깊이를 선사할 수 있다. 전형적인 남녀 주인공의 모습에서 벗어난 모습을 그린다. 서로의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귀엽게 느껴진다. 누구보다 서로를 좋아하지만 상대에게 피해가 갈까봐 마음을 숨기는 게 오히려 서운함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런 섬세함은 ‘플래그타임’에서도 나타난다. ‘나팔꽃과 카세씨’가 귀여운 첫사랑의 감정이라면 이 작품은 아픔과 성장의 의미를 심도 있게 담아낸다.

 

미스즈는 3분 동안 시간을 멈출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이 능력을 자신이 곤란할 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자꾸만 말을 거는 아이가 다가올 때 말이다. 미스즈는 야마다와 비슷한 듯 다르다. 야마다는 수줍음은 많지만 교우관계에 어려움을 겪진 않는다. 반면 미스즈는 교우관계 자체를 어려워한다.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으면 한다. 그녀는 자발적 외톨이다.

 

자발적 외톨이에게도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있는 법이다. 미스즈는 학교 최고의 미소녀 무라카미를 흠모하고 있다. 시간을 멈춘 그녀는 몰래 무라카미의 치마를 올리고 팬티를 본다. 한데 무라카미가 미스즈를 바라보고 있다. 무라카미의 시간은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 순간 미스즈의 시간에 무라카미가 들어온다. 무라카미는 미스즈를 변태라고 소문내지 않는 조건으로 자신과 함께해줄 것을 제안한다.

 

즉, 미스즈의 시간을 멈추는 마법은 무라카미와 함께하는 순간에만 사용할 수 있다. 대신 무라카미는 미스즈에게만 마음을 줄 것이라 말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3분 동안 자신들만의 세상을 갖게 된다. 사랑에는 아지트가 필요하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두 사람만 함께 있을 수 있는 은밀한 공간이. 미스즈와 무라카미에게는 학교 전체가 그 은밀한 공간이다. 두 사람은 시간만 멈춘다면 학교 어디에서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

 

▲ '플래그타임' 스틸컷  © (주)얼리버드픽쳐스

 

이 작품이 심도를 더하는 지점은 미스즈가 화장실에서 친구들의 대화를 엿듣는 순간이다. 미스즈는 친구들이 무라카미를 좋아하지만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무라카미는 대화에서 상대를 배려하고 도움을 거절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한 무라카미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반감을 산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라카미에 대해 잘 모르는 학생들은 그녀의 빈 공간을 부정으로 채워 넣는다.

 

미스즈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3분 동안 두 사람은 같은 세계를 공유하지만 무라카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그녀도 알지 못한다. 미스즈는 무라카미에 대해 더 알고 싶다. 무라카미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미스즈를 좋아하는지. 미스즈 역시 야마다나 카세처럼 상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다. 미지의 존재인 무라카미와 시간이 아닌 마음의 공간 역시 함께 나누고 싶다.

 

무라카미의 캐릭터에 물음표를 부여하면서 작품은 섬세함을 더한다. 미스즈는 무라카미를 통해 성장하고 무라카미는 미스즈를 통해 자신의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나간다. 학원물이 지닌 성장의 메시지를 백합물의 색으로 표현하면서 섬세함을 더한다. 상처와 아픔을 통한 성장이란 의미는 같지만 그 과정을 새로운 색으로 배합해낸다. 마치 빛처럼 여러 색이 합쳐져 새하얀 햇살이 사방을 밝히는 기분이다.

 

최근 할리우드의 트렌드는 다양성이다. 동성애는 더는 특별한 소재가 아니며 동성애를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파격을 내세우는 시대도 아니다. 동성애는 하나의 소재로 정착했으며 다른 장르와의 융합을 통해 색다른 감정을 선사할 수 있다. ‘나팔꽃과 카세씨’와 ‘플래그타임’은 순정 학원물의 공식 안에 백합물의 매력을 가미하면서 조금은 더 섬세하고 특별한 소녀의 세계에 빠져드는 순간을 선사한다.

 

김준모 기자| rlqpsfkxm@cinerewin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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