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길고 긴 이별을 위한 감정과 시간

[프리뷰] '조금씩, 천천히 안녕' / 5월 27일 개봉 예정

김준모 | 기사승인 2020/05/22 [21:45]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길고 긴 이별을 위한 감정과 시간

[프리뷰] '조금씩, 천천히 안녕' / 5월 27일 개봉 예정

김준모 | 입력 : 2020/05/22 [21:45]

▲ '조금씩, 천천히 안녕' 포스터     ©(주)디스테이션

 

[씨네리와인드|김준모 기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부인 낸시는 남편이 치매에 걸리자 ‘길고 긴 이별’이라고 말했다. 레이건 대통령 역시 치매임을 알게 된 뒤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황혼으로 가는 긴 여행을 떠나려 한다’는 표현으로 치매가 얼마나 길고 힘든 이별의 여정인지 보여줬다. 작가 나카지마 쿄코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이 여정이 결코 슬픔과 고통만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치매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당사자는 물론 가족 역시 힘들게 한다는 점이다. 당사자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며 어린아이처럼 변하는 자신의 모습에 고통을 느낀다. 영화를 통해 예를 들자면 ‘로망’에서 남봉은 부인 매자를 돌보다 자신도 치매라는 사실을 알고 혼란을 느낀다. 이때 남봉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점점 자신과 멀어지는 건 물론 소중한 사람들과의 기억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 바라보는 가족 역시 힘들다. 치매가 시작되면 점점 어린아이처럼 변해간다. 몸이 나이가 들면 기능이 퇴화하는 거처럼, 정신의 퇴화는 기억은 물론 세월이 만든 사회화를 지워나간다. 자그마한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다 큰 어른을 마치 아이처럼 대하는 건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그 사람과의 추억 때문에 새로운 사람으로 인식하기 힘들다. 아버지 쇼헤이의 생일 날, 어머니 요코는 두 딸 마리와 후미를 부른다.

 

▲ '조금씩, 천천히 안녕'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쇼헤이의 치매 사실을 알게 된 딸들은 조금씩, 천천히 이별의 순간을 준비한다. 보통의 이별이 갑작스레 다가오는 반면 치매는 그 시점을 알 수 있기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느 자식이 그러하듯 마리와 후미는 온전히 쇼헤이에게 집중할 수 없다. 마리는 미국에 살고 있다. 그녀는 쇼헤이를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야하고, 남편은 당신 집은 여기인데 왜 자꾸 집에 간다고 하느냐며 나무란다. 여기에 나이가 들수록 엇나가는 사춘기 아들의 모습은 자신이 신경을 덜 써줬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마리에게 심어준다.

 

후미는 꿈은 많지만 이룬 건 없는 청춘이다. 자신만의 레시피로 빵을 만들고 싶지만 그 길이 쉽지만은 않다. 장례식장에서 후미는 아버지처럼 교사의 길을 걷느냐는 어른의 말에 아버지처럼 훌륭한 길은 가지 못하고 있다 답한다. 어찌어찌 꿈에 도달할 거 같다가도 결국 제자리걸음인 후미는 쇼헤이를 만나는 게 편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은 함께 추억을 쌓아간다. 이 추억은 작가 나카지마 쿄코가 바라보는 치매의 관점이기도 하다.

 

▲ '조금씩, 천천히 안녕'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작가는 치매에 걸린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만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삶에는 기쁨이 있다가도 슬픔이 오고, 즐겁다가도 분노를 느끼게 된다. 영화는 이 네 가지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슬픔 속에도 기쁨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먼저 기쁨이 잘 나타나는 장면은 놀이공원 장면을 뽑을 수 있다. 언제나처럼 치매에 걸린 쇼헤이는 불쑥 집을 나가고, 가족은 스마트폰 위치추적 앱을 통해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곳은 과거 가족이 놀러갔던 놀이공원이다. 이곳에서 쇼헤이는 보호자가 없어 회전목마를 타지 못하고 있는 자매를 도와준다. 마리와 후미는 그 모습을 보고 과거의 추억을 떠올린다. 만약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곳을 향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린 자매를 도와 회전목마에 함께 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가족은 짧은 순간이지만 옛 추억을 떠올리며 행복에 젖는다.

 

▲ '조금씩, 천천히 안녕'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분노를 느끼게 만드는 장면은 마트 장면이다. 마트를 향한 쇼헤이와 요코는 장을 보고 난 후 나오다가 점원에게 붙잡힌다. 쇼헤이가 사탕을 비롯해 물건을 훔친 것이다. 쇼헤이는 교사로 일하며 정년퇴임을 했다. 정직하고 신사 같은 그는 치매를 이겨내지 못하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잘못을 저지른다. 점장은 이런 변명은 많이 들어봤다며 치매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때 쇼헤이는 마치 교사처럼 점장에게 복도로 나가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 장면은 관객은 물론 요코와 후미에게도 분노를 느끼게 만든다.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창피해진 이 순간을 견디기 힘들다. 치매만 아니었다면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굴욕적이게도 고개를 숙이고 몇 번이고 미안하다 사과를 한다. 병 앞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도 분하다.

 

▲ '조금씩, 천천히 안녕'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슬픔을 느끼게 만드는 장면은 쇼헤이가 쓰러지는 장면이다. 치매가 다가오면 무서운 건 결국 그 병이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신체의 기능이 떨어지면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는 거처럼 정신 역시 약해질수록 몸의 기능을 떨어뜨린다. 쇼헤이가 쓰러지면서 가족은 느끼게 된다. 이제 정말 이별의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이 순간이 더 아린 이유는 그들에게 닥친 운명이 현실처럼 담담하기 때문이다.

 

가족 사이의 드라마틱한 갈등이나 관계의 전환은 일어나지 않는다. 2년을 간격으로 7년 간 진행되는 스토리 동안 그들의 모습은 한결 같다. 후미는 여전히 꿈을 향해 달리고만 있고, 마리가 미국에서 겪는 갈등은 명확한 해결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아버지의 병세만 나날이 깊어질 뿐이다. 특별한 추억 만들기도, 갑작스러운 고백과 아름다운 갈등의 해소도 없다. 때문에 슬픔은 영화가 아닌 현실로 다가온다.

 

즐거움을 느끼게 만드는 장면은 두 가지다. 먼저 영화 속 가족에게 있어 가장 즐거울 장면은 생일파티 장면이 아닐까 싶다. 가족은 쇼헤이에게 고깔모자를 씌우고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음꽃을 피운다. 이별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단 건 알지만 이대로 우는 얼굴도 쇼헤이를 보내주고 싶진 않다. 어쩌면 요코와 자매는 즐거워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쇼헤이 곁을 지켰을지 모른다.

 

▲ '조금씩, 천천히 안녕'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관객의 경우 손자와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마리는 아들에게 할아버지가 오래 살지 못할 수도 있다며 일본으로 데려간다. 손자는 집에 혼자 있다 쇼헤이를 만난다. 당황도 잠시, 치매에 걸려 정신이 어려진 쇼헤이는 묘하게 손자와 잘 통한다. 손자가 알려달라는 한자를 알려주고 기고만장한 건 물론 길가에서 길을 잃어버렸다가 만나서 함께 길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한다.

 

특히 미국에 있는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어울리자 불안해진 손자와, 친척 집에서 불안을 느낀 쇼헤이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칭얼거리는 장면은 묘한 웃음을 선사한다. 쇼헤이의 캐릭터는 은근한 코믹성을 보여준다. 때문에 억지스런 감동과 웃음보다는 자연스럽게 쇼헤이의 모습을 통해 웃음과 묘한 상황을 만들어 내며, 이는 치매에 잠식당하는 게 아닌 견디며 함께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표현한다.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담백하다. 슬픔을 다룬 영화에게 이런 표현은 좋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목처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이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틱한 설정과 눈물을 쏙 빼놓는 신파적인 요소를 원한다면 실망할지 모른다. 하지만 슬픈 순간에는 우울과 절망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고 그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낀다. 그렇기에 필요한 건 함께 추억을 만들어 가고 이를 기억할 수 있는 시간과 감정임을 보여준다.

 

 

김준모 기자| rlqpsfkxm@cinerewin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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