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꿈처럼

영화 '비포 선라이즈'

박세진 | 기사승인 2020/09/29 [13:23]

한여름 밤의 꿈처럼

영화 '비포 선라이즈'

박세진 | 입력 : 2020/09/29 [13:23]

[씨네리와인드|박세진 리뷰어] 설렘이라는 단어보다 여행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낯선 곳과 그곳의 낯선 공기낯선 햇빛그곳에서 마주하는 낯선 이들과 낯선 인연들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행은 늘 짜릿하고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여행은 늘 설렌다존재만으로 가슴이 뛰는 공간에서 운명처럼 누군가에게 빠진다는 것이 같은 낭만적인 우연을 우리 모두 꿈꾸어 본 적이 있지 않을까. <비포 선라이즈>는 우리의 그런 어설픈 낭만을 스크린 안에 수려하게 옮겨 놓은 작품이다

 

  ▲ '비포 선라이즈' 스틸컷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이 영화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셀린과 제시가 비엔나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 이야기다파리로 향하던 셀린과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비엔나로 가던 제시는 기차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되고기차에서 내리기 전 제시는 셀린에게 자신과 함께 비엔나에 내리자고 제안한다그리고 함께 기차에서 내린 둘은 밤새 비엔나를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고마음을 나눈다

 

여행은 자신의 일상을 벗어나는 행위이고여행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나의 일상을 침범하지 않는다그래서 때로는 나의 일상 바깥의 낯선 이에게 나를 내보이는 것이 더 쉬울 때가 있다실제로 제시와 셀린 역시 처음 만난 서로에게 자기 생각과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것 같아 보인다서로의 사적인 일들과 서로가 가진 생각들을 재치 있게 물어보고 스스럼없이 답한다그렇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은역설적이게도 서로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되었음을 인정한 뒤이다

 

▲ '비포 선라이즈' 스틸컷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둘이 마주 보며 서로의 친구인 척 전화하는 연기를 하는 장면이다셀린이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제시에게 전화를 건다그리고 그녀는 친구(를 연기하는 제시)에게 제시를 만난 일을 이야기한다기차에서 잠깐 얘기한 후에 이미 그와 함께 기차에서 내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자신이 한 말들 때문에 그가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그녀는 자신의 진심을 내보인다그에 제시는 그녀의 친구가 되어 그가 너에게 빠져있을 거라고 말해준다역할을 바꾸어이번에는 제시가 자신의 친구인 척하는 그녀에게 자신이 비엔나에 온 진짜 이유를 이야기해준다

 

비엔나 발 비행편은 특별히 더 싸지 않았고그는 단지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완전한 유령으로 지낼 시간이 필요했다고 고백한다그만큼 전 여자친구와의 결별이 힘든 일이었다고그런데 그 끝에 셀린을 만나 참 좋았다고자신의 마음을 보여준다처음 만난 사이이기 때문에 자신을 쉽게 드러내는 것 같았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완전히 빠진 순간에야 비로소 솔직해지는 모습이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인 것 같다낯선 곳에서의 환상 같은 하룻밤을 담았지만셀린이 한 말처럼 서로를 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것.

 

실제로 이 영화는 밤과 낮꿈과 현실을 나누며 두 사람의 사랑이 어디에 속할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이 영화의 시작에 제시와 셀린이 만나게 되는 계기는 낮의 기차에서 벌어지는 한 부부오래된 연인의 싸움이다권태기인 듯 서로 티격태격하는 부부를 피해 둘은 대화를 하게 되고거기에서 이 어린 연인의 환상 같은 인연이 시작된다현실은 차갑고 구질구질한 것그리고 꿈은 뜨겁고 아름다운 것처럼 이야기된다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사랑을 꿈의 영역에 넣어 놓으려 한다.

 

  ▲ '비포 선라이즈' 스틸컷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마치 꿈속에 있는 기분이야이 시간을 우리가 만들어낸 것 같아서로의 꿈속에 나타나는 것처럼.” (중략) “정말 멋진 건 이 저녁이 꼭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들의 밤이 저물어 갈 무렵셀린과 제시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제시의 대답처럼 이 둘의 하룻밤은 우연에 근거한존재할 리 없었던 시간이다하지만 우연이라는 마법이 그들에게 꿈 같은 밤을 선물한다하지만 이 꿈 같은 밤 밖에는 아침이라는 시간으로 상징되는 현실이 존재한다그리고 꿈을 꾸는 이 어린 연인도 그것을 잊지 않는다그들은 현실 속에서 시간이 흐르며 식어가는 감정바래 버리는 관계를 경계한다셀린과 제시 모두 현실의 관계에서 느낀 권태감과 아픔이 있다우연이 부린 요술로 그들은 잠시 한 자리한 시간에 같이 있게 되었지만아침이 되어 마법이 풀리고 나면 그들의 앞에는 현실이 닥칠 것이고미국과 유럽에 떨어져 사는 두 사람의 관계에는 미래가 없을 것이다

 

이 밤의 마법 같던 강렬한 인상이 현실에 희석되어 버리는 것보다 온전한 한 방울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었던 두 사람은 이 밤을 하나뿐인 유일한 밤으로 만들기로 한다하지만 결국 그들은 헤어지기 직전 자신들의 서약을 깨고, 6개월 후 헤어진 자리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그들이 한여름 밤의 꿈에서 깨어나도, 6개월 후 비엔나에 추위가 찾아와도그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현실에서 재회한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아름답기만 할까

 

  ▲ '비포 선라이즈' 스틸컷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아침이면 우리는 다시 호박으로 변할 거야그래도 지금 넌 유리구두를 들고 맞나 안 맞나 확인해 봐야 해.” “꼭 맞을 거야.”

 

헤어진 후 각자 기차와 버스에 앉은 둘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보면 어젯밤의 그 마법은 둘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 분명하다그들의 사랑이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헤매더라도아침이 되어 마법이 끝나더라도꿈에 떨어뜨리고 간 유리구두는 셀린의 발에 꼭 맞을 것이고제시와 셀린이 다시 만날 겨울날은 오래전 그 여름밤처럼 따뜻하고 예쁠 거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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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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