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저녁 시간에 돌아보는 삶의 오점들

영화 '남아있는 나날(1993)'

백유진 | 기사승인 2020/11/20 [11:00]

인생의 저녁 시간에 돌아보는 삶의 오점들

영화 '남아있는 나날(1993)'

백유진 | 입력 : 2020/11/20 [11:00]

 

▲ '남아있는 나날' 포스터.  © 씨네리와인드


[씨네리와인드|백유진 리뷰어] 최근에는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각본가로 잘 알려진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연출한 <남아있는 나날>(1994)은 일본계 영국 소설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남아있는 나날> 이전부터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전망 좋은 방>(1985), <모리스>(1987), <하워즈 엔드>(1993)까지,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 E.M. 포스터의 소설들을 꾸준히 영화화한 감독이다. 마치 소설책을 영상으로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장면 하나하나가 세심하며 문학적이다.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 포인트들을 영화의 영상미로 아름답게 잘 살려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감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아 있는 나날>을 좋게 보셨던 분들이나, 혹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문학 영화를 더 깊이 즐기고 싶으신 분들은 앞서 소개한 영화를 감상하시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남아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슨은 전쟁이 끝난 30년대 영국의 달링턴 홀을 관리하는 수석집사다. 그 어떤 것보다 집사로서의 품위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스티븐슨.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문장이 있다.

 

  "위대한 집사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 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중략)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이다." (58)

 

품위란 집사가 섬기는 주인을 위해 자기 실존을 포기하고 감정의 동요를 일체 허락하지 않으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능력이자, 집사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로써 스티븐슨 스스로도 여기에 엄청난 자긍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품위에 스스로 증명을 내 보이듯 스티븐슨은 아버지가 임종을 맞는 순간에도 일을 끝까지 마치는 침착함,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마음 한번 내비치지 않는 실존 포기를 보여준다.

 

  © 백유진

 

이런 스티븐슨에게도 두 가지의 욕망이 살짝 내비친다. 첫 번째는 달링턴 경과 같은 품위 있는 영국 신사에 대한 동경과 그런 주인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자긍심. 두 번째는 켄튼 양과의 사랑이다. 첫 번째 욕망은 스티븐슨이 현재의 미국인 주인의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 만난 사람들이 그의 차를 보고 진정한 신사라 치켜세우며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묻자 정치인 행세를 하는 스티븐슨에게서 볼 수 있다. , 집무실에 꽃을 놓는 일조차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게 하는 방해물로 여기던 그가 조용히 혼자서 로맨스 소설을 읽는 모습에서 그 역시 사랑을 꿈꾸는 한 사람의 욕망을 지녔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스티븐슨은 그의 아버지 시대에서부터 물려받은 구시대적 전통관에 의해 올바른 판단이나 자아 주체적 생각을 내릴 기회조차 얻지 못한 불쌍한 인물이자 사랑과 존경을 받고 싶었던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을 대표하는 것 같다. 하지만 끝까지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자기변명적 어조를 늘어뜨리는 스티븐슨은 꽤나 비겁하게 느껴진다. 아마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억누르면서까지 끝까지 유지해온 집사로서의 품위와 그가 신뢰하고 존경해온 달링턴 경을 부정하는 행위는 그가 살아온 전 인생을 부정하는 일이 될까 두려웠을 것이다.

 

‘The Remains of the day’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 작품은 스티븐슨의 남은 하루, 흔적을 제대로 다시 보고자 함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오역은 여러 비판이 있음에도 나는 꽤 괜찮은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스티븐슨의 인생을 하루의 시간으로 비유하자면 저녁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얼마 남지 않은 하루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직 자정이 되기까지 지난 오점을 되돌릴 시간은 충분하게 느껴진다. 켄튼 양도 이렇게 말했다.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이며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그래서 이 영화는 켄튼 양의 편지를 받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 자동차 여행이자 잘못된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는 로드무비라고 할 수 있겠다.

 

  © 백유진

 

이 작품이 좋았던 점은 주인공의 회심에도 불구하고 이미 너무 늦었다고 말해주는 현실적인 씁쓸함과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되었다는 자조적인 웃음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뒤늦게 켄튼 양을 만나러 왔지만 이미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현실적인 대답을 듣게 되고, 영화롭고 유서 깊은 달링턴 홀은 실용적인 조언을 하던 미국인 패러데이의 것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필자는 스티븐슨의 남아있는 나날을 희망적으로 보고 있다.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이는 달링턴 홀의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어느 날 비둘기 한 마리가 달링턴 홀에 날아든다. 비둘기를 안아 들고 조심스레 날려 보내는 동시에 카메라는 비둘기의 시점에서 달링턴 홀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스티븐슨의 남아있는 나날 동안 시작될 새로운 하루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보도자료 및 제보cinerewind@cinerewind.com 

백유진
씨네리와인드 객원취재부 기자단 4기
cinerewind@cinerewind.com

Read More

  • 도배방지 이미지

남아있는나날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