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 'E'가 붙는 앤

다시 탄생한 넷플릭스 '빨간머리 앤'의 절반의 성공

최정현 (자유기고가) | 기사승인 2020/12/31 [10:00]

끝에 'E'가 붙는 앤

다시 탄생한 넷플릭스 '빨간머리 앤'의 절반의 성공

최정현 (자유기고가) | 입력 : 2020/12/31 [10:00]

▲ NETFLIX '빨간머리 앤' 스틸컷.  © NETFLIX

 

[씨네리와인드|최정현 자유기고가] 빨간머리 앤이 다시 탄생했다. 어린 시절 추억에 머물러있던 앤이 우리에게 용기와 위로를 전해주는 아이콘이었다면 넷플릭스 시리즈 빨간머리 앤은 조금 다르다.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여느 장르 작품에서 던져지는 시사점은 각기 각색이다. 대중들의 눈은 더욱더 높아지고 사회에 요구되는 시선은 많은 검열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 감독 작품이면서 모든 작가진이 여성으로 구성된 빨간머리 앤의 리메이크는 전 세계 팬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17년 넷플릭스로 공개되어 시즌 3까지 공개된 <Anne with an “E”>에서는 민감할 수 있는 소재를 영리하게 풀어낸다. 소설과 드라마를 막론하고 앤의 첫인상은 다름으로 비호감을 주기도 했지만그녀는 여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를 외쳤던 그 시대의 페미니스트였다. 드라마에서는 소설보다 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드라마가 표방하는 페미니즘 주제 의식을 더 두드러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동성애자, 흑인, 캐나다 원주민으로서 앤의 친구로 불린다.

 

앤은 자신의 흔한 이름에 특별함을 부여하고자 끝에 ‘E’를 붙여주기를 요청한다. 좀 더 나아가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E’‘Equality’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드라마에서는 페미니즘과 함께 흑인, 캐나다 원주민을 두고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얘기하는데, 여기에는 결함이 존재한다. 바로 이 백인 여성이자 시혜적 태도를 극복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지적이다. 앤의 이미지는 친절하고 편견 없는 소녀이자 그들에게 스스럼 다가가는 모습으로 비친다. 예로 앤이 살고 있는 그린 게이블은 매우 보수적인 동네이며 여태까지 흑인이 살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런 서배스찬에게 앤은 인사를 건네고, 어른들의 생각에 반발한다. 마찬가지로 어른들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구역을 침범했다고 생각하지 본인들이 빼앗았다고 생각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앤은 그들 중 또래인 카퀫과 친구가 되기에 이른다.

 

과연 이 모습이 바른 평등을 주장하고자 하는 건지, 백인의 이미지를 포장하는 건지는 아쉬움을 주는 대목이다. 유색인종은 백인의 관용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고마워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앤의 존재로 하여금 그들은 능동성을 잃고 도움에 기대는 의존적인 모습을 유도한다. 왜냐, 극에서 등장하는 유색인종들은 거칠거나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백인의 관용에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유순한 성질. 그것이 극에서 견고하고 뿌리 깊게 작용하는 장치다카퀫이 납치당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카퀫의 부모는 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결국 앤의 부탁에 매슈는 따라나서고, 백인 남성과 동행했기 때문에 부모는 그때서야 관계자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부모는 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근처에서 기약없는 기다림을 택한다. 소녀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그들의 권력은 우리도 자칫 간과한 채 넘어가기 쉽다. 우리는 그들에게 또 다른 유색인종이며 더구나 동양인은 흑인보다 익숙지 않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다.

 

▲ NEFLTIX '빨간머리 앤' 스틸컷.  © NEFLIX

 

예부터 차별에 항의하는 존재는 주체가 아닌 힘을 빌려주는 타자였다. 다시 말해 결국 강자를 빛내주기 위한 약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차별을 다루는 주제에서 백인은 주인공에 앞서 강조된다. 그들의 능동성은 노출되지 못한 채 이들을 도움에 기대는 존재로 만들기 마련이다. 똑같은 예로 흔히 발생했던 흑인의 기차 탑승 거절 사건처럼 에피소드 하나가 더 등장한다. 서배스찬은 돈을 갖고 있음에도 쫓겨날 위기에 놓이는데 그때 항의하며 나서는 존재는 백인남성 길버트이다. 백인은 특권을 가지고 있고 가장 먼저 인권을 보장받아왔기 때문에 그러한 기득권을 스스로 성찰하는 데 주목해야 한다.

 

현재와 미래는 보여주기식이 아닌 진정한 연대를 주문한다. 유색인종의 수동성은 강한 행동력을 보여주지 않는 모습을 계속해서 전시할 때에 오히려 연속적인 가해로 남을 것이다. 빨간머리 앤은 이러한 점에서 실수를 반복하고 말았다. 2020년에 다시 만난 명작의 불편함은 많은 고찰을 남긴다. 과연 우리는 명작이라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있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우리가 느끼는 이 불편함이라는 감정이 평등이라는 단어에 가까워지길 바라본다.

 

* 최정현 (자유기고가)국문학과 문화콘텐츠학을 공부하는 학생. 아트시어터를 좋아하고 그에 기반한 영화 리뷰와 해석을 씁니다. / 본 글은 씨네리와인드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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