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와인드|백유진 리뷰어]
회복(回復)이란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한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음.”
영화 중간에 한 병사가 부르는 노래, “저는 아버지를 뵙기 위해 그곳으로 갑니다. 더 이상 헤매지 않아도 되는 그곳으로.. 요단강을 건너 집을 향해 갑니다.” 이 노래의 구절처럼 영화는 내가 떠나온 처음의 자리, 본질, 본향, 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17>은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14년에서 1918년에 걸친 1차 세계대전인데 영화는 왜 하필 1917년을, 그것도 가장 중요한 영화 제목으로 쓸 만큼 이 연도를 강조한 걸까? 그것은 1917년은 전쟁이 시작된 지 3년이 지난, 아주 지긋지긋한 해였기 때문이다. 처음 전쟁이 터질 때만 해도 이 싸움이 이렇게까지 오래 지속되리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초반의 사기와 애국심은 사라지고, 오직 삶의 권태와 죽음의 체념만이 깔린 채 사람들은 이 지독한 전쟁이 빨리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공 스코필드(조지 맥케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쟁 병사라면 살면서 꼭 한 번은 받길 바라는 훈장 메달을 와인 한 병과 그냥 바꾸는 사람이었다. 동료인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는 메달을 집에 가져가면 다들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겠냐며 그를 나무라지만, 스코필드는 그저 쇳덩이일 뿐이라며 냉소적으로 받아친다. 사실 스코필드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끝날 줄 모르는 전쟁으로 인해 삶을 거의 포기한 회의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혼돈의 전쟁터가 스코필드를 시체와도 같은 상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난 뒤, 스코필드는 다시금 삶을 꿈꾸게 된다. T.S. 엘리엇은 “우리의 모든 탐색의 끝은 우리가 출발했던 곳에 도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처음으로 다시 발견하는 것.”이라 말했다. <1917>은 원래의 자리, 떠나왔던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세상에서의 방황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처럼 스코필드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다시 한번 ‘귀향’을 꿈꾸게 된다.
영화의 첫 시작이 나무에서 죽은 듯 자고 있던 스코필드였다가, 삶의 희망을 꿈꾸며 역시나 나무에 기대어 편히 쉬는 스코필드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처음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영화의 주제적 측면이 수미상관의 형식미와도 맞닿아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나온다.
떠나온 동안, 우리의 본래 정체성과 선한 본성을 잊은 채 살아가게 된다. 어느새 나를 잊어버리고 삶의 권태에 찌들어가는 요즘 같은 때가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마치 전쟁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이 코로나 사태는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더니 도저히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많은 것이 바뀌었고 우리의 내부에선 회의적인 목소리가 삶의 에너지를 잡아먹고 있다. 그런 시기에 영화 <1917>의 메시지는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꽃을 피우기 직전 썩어 죽어버린다는 체리나무처럼, 가장 암울한 터널 끝에 만개하는 체리 꽃이 보일 것이라는 희망이 피어오른다.
이제 먼 방황을 끝내고 처음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본래의 내가 기다리는 그곳으로, 방황하던 나를 따스히 맞아주는 아버지가 계신 나의 집으로.. 그곳에선 우리의 지친 영혼과 육신을 편히 쉬일 수 있을 것이다.
보도자료 및 제보|cinerewind@cinerewind.com <저작권자 ⓒ 씨네리와인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