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욕망과 신념이 빚어낸 거대한 희비극

Review|'옥자'(2017)

김혜란 | 기사승인 2021/07/12

각자의 욕망과 신념이 빚어낸 거대한 희비극

Review|'옥자'(2017)

김혜란 | 입력 : 2021/07/12 [16:13]

[씨네리와인드|김혜란 리뷰어] 어떤 영화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대개 이런 경우, 덤으로 찝찝함의 감정이 뒤따른다. 이 질문은 좀처럼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으며, 혹은 해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옥자>가 대표적인 예이다. 희망과 무력감의 교차를 <옥자>는 육식과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를 통해 신랄하게 보여준다.

 

▲ 영화 '옥자' 포스터  © (주)NEW

 

글로벌 기업 미란도는 슈퍼 돼지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바로 지구의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슈퍼 돼지, 말 그대로 엄청나게 큰(맛 좋은) 돼지를 발명한 것. 그러나 유전자 조작 사실을 숨기기 위해 새로운 종의 발견으로 거짓 발표하고, 총 26마리의 아기 돼지를 미란도의 해외 지사가 있는 나라의 내로라하는 축산인에게 보낸다. 강원도 산골에 사는 미자는 슈퍼 돼지 중 한 마리인 옥자1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누구보다 돈독한 우정을 쌓는다.

 

미란도측에선 슈퍼 돼지 콘테스트에서 옥자1등을 했다며 뉴욕으로 데려가려 하고, ‘옥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미자는 동물 보호 단체인 ‘AFL’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들은 억압받는 동물들을 해방하기 위해 옥자를 미끼 삼아 실험실의 영상을 찍어 공개할 계획을 실행하기 전, 미자의 허락을 구한다. ‘미자는 이를 거절하지만, ‘케이는 의도적으로 번역을 잘못하여 ‘AFL’은 계획에 그대로 착수한다. 서울 도심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 끝에 옥자는 미국으로 가게 되지만, ‘미란도의 기업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을 염려한 대표 루시미자를 공식적으로 뉴욕에 초청한다.

 

슈퍼 돼지 콘테스트 행사 당일, ‘옥자미자가 무대 위에서 재회한다. 동시에 비인도적인 실험실을 찍은 영상이 무대 뒤 대형 스크린에 틀어지고, 행사 곳곳에 숨어있던 ‘AFL’은 시위를 시작한다. 한바탕의 소동 끝에 옥자는 결국 도축장으로 가게 되고, ‘미자’도 도축장으로 향한다. 수많은 돼지가 도살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 미자는 도축되기 직전의 옥자를 발견하여 살려달라 간청한다. 그러나 낸시’(‘루시의 쌍둥이 언니)가 이를 단호히 거절하자 미자는 할아버지에게 받았던 금 돼지를 내밀며 옥자를 산 채로 사겠다고 말한다. ‘낸시는 이에 승낙하고, ‘미자는 무사히 옥자를 구하여 다시 평화로운 산골에서 살아가게 된다.

 

▲ 영화 '옥자' 스틸컷  © (주)NEW

 

죄책감을 누르는 관성

 

인간이 고기, 그러니까 육류와 해산물을 섭취한 것은 수렵과 사냥이 시작됐던 인간의 태초부터였다. 그때의 육식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서였지만, 오늘날 육식을 마냥 생존을 위해서라고 하기엔 겸연쩍은 부분이 많다. 지구상에 있는 척추동물 중 오직 3%만이 야생에 존재하며, 67%가 축산을 위해 길러진다. 나머지 30%가 인간이다. 인간의 육식은 자연적인 것을 넘어선 지 오래다. 동물권과 환경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채식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에선 채식에 대한 모욕은 흔하다. 육식을 당연함내지 기본으로 정의한 사람들은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을 유달리 예민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에 대해 지적을 받거나, 혹은 잘못됐다고 직접 말하지 않아도 반대를 행하는 사람을 보면 보통 반성보단 반발이 먼저 고개를 쳐든다. 한국에서 으레 일어나는 채식에 대한 모욕은 이러한 반발심에서 기인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옥자>를 보며 필자의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불쾌한 감정도 이런 반발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육류와 해산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인간이 흔히 식용으로 기르는 닭, , 돼지 등의 동물이 처참한 환경에서 평생을 자라 결국 인간의 먹이가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육식을 당장 멈추기엔 관성에 물든 식욕을 버릴 수 없었다. 가끔 생고기를 볼 때의 그 섬찟함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옥자>는 그런 필자의 모습을 스스로 반추하게 만든다.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알았던 그 비겁함을 곱씹게 만든다. 그렇지만, <옥자>가 육식을 무조건 비난하는 영화라고 하긴 어렵다. 상반된 신념과 목표를 가진 두 단체(‘미란도‘AFL’)의 모순적인 모습을 각각 그리는 방법을 통해 관객이 육식에 대해 가질 혼란을 증폭시킨다. 이 영화는 채식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명확한 답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육식이 결국 생명을 앗는 행위라는, 흔히들 간과하는 당연한 사실을 단단히 일러두면서 육식이 과연 정말로 '당연한 일'인지를 강력하게 묻는 영화다.

 

생존은 불가피하게 착취와 이어진다. 그러나 이 불편한 사실이 자연스러운 일을 부자연스럽게 행하는 것마저 변호할 수 있는 논거가 되진 않는다. 만약 당신이 <옥자>를 보고 반발심 내지 죄책감을 느꼈다면, 분명 인간의 육식은 과잉되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나마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생존과 동물의 생존을 저울에 올려 무게를 다는 일은 가혹하다. 다만, 육식을 멈출 수 없다면 적어도 동물을 덜 잔인하게 고기로 만드는 방법을 고심해야만 한다. 그것이 잡식성 인류에게 내려진 중대한 숙제다.

 

▲ 영화 '옥자' 스틸컷  © (주)NEW


자본주의의 주인

 

영화 속 미자옥자를 산 채로 구매하는 방법으로 구출한다. 언뜻 해피엔딩으로 보이는 이 결말이 미묘한 씁쓸함을 안겨주는 건 도축장을 나오는 옥자미자뒤에 펼쳐진 수많은 돼지 때문이다. 그때 미자가 느꼈을 무력감을 필자 또한 느꼈다. 이런 허무한 감정은 옥자미자의 안온한 삶이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변함없었다. 당장 내 옆의 소중한 이는 구해냈지만, 많은 희생을 뒤로 한 채, 묵인한 채, 지운 채 그저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미자의 삶과 우리네 삶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를 금을 이용한 거래로 구해냈다는 사실은 씁쓸함을 안겨주기 충분하다. 자본주의가 제1의 원칙이 되어가고 있는 이 지구에선 미자옥자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이 거래가 언뜻 기묘하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절차로 보인다. 이 장면은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 번째,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자본에 근거한다는 것. 두 번째, 자본주의의 주인은 결국 우리라는 것. 이 두 가지의 의미는 아주 다른 깨달음을 안겨준다.

 

▲ 영화 '옥자' 스틸컷     ©(주)NEW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영화 속 금으로 만든 돼지처럼. 이는 다소 속물적으로 비칠 수 있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만이 온전한 타당성을 확보한다. 첫 번째 의미가 주는 퍽 냉소적인 깨달음은 아직 어린 미자에게 세상의 쓴맛을 알려줬음은 물론이고, 필자의 마음에도 싸늘함을 안겨주었다.

 

다만, 후자의 의미는 미약한 희망의 불씨처럼 보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하는 사람은 결국 소비자다.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돈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따라서 기업은 철저하게 반응한다. 만약 사람들이 비인도적인 과정을 거친 육류(생산품)를 소비하지 않는다면,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 보다 인도적인 방법을 선택할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나아가 아예 육류를 소비하지 않는다면(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업은 더 이상 육류를 판매할 이유가 없다. 생명을 존속할 수 있는 선택의 제일선에 있는 존재들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책임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이 책임감의 무게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선택권이 가지는 힘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 속 희망은 가끔 너무나도 작아 잘 보이지 않는다. 분명 존재하긴 하나, 그 힘이 심히 미약해 보인다. (가장 최근 영화인 <기생충>은 아주 작은 희망마저 짓밟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옥자>도 마찬가지다. 씁쓸하고 미묘한 이 영화에서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는 미자옥자의 우정도 아니고, 자본주의에서 오는 깨달음이었다. 이 차가운 논리 앞에 우리가 해방의 불을 지피려면 결국 자본으로서 변화를 보여줘야 한다는, 서늘하고도 아슬아슬한 깨달음이었다.

 

▲ 영화 '옥자' 스틸컷  © (주)NEW

 

<옥자>는 거대한 쇼처럼 느껴지는 영화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쿠키 영상까지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풍자극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기들 딴에는 진지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지만 우스꽝스러운 인물들도, 두 세력이 격돌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화려하고 비참한 광경도 모든 게 생명을 담보로 진행하는 서커스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보인다. 내용의 신랄함과 꺼림칙함을 고려하면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연출로 보인다. 육식은 아직 대다수 인간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일상적인 일이다. 이런 육식에 반기를 든다고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관객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최대한 덜어내기 위해 인물부터 사건까지 부러 현실에서 1m 정도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연출했다.

 

<옥자>는 육식을 당장 멈추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조용히 육식에 대한 여러 생각과 갈등을 되짚어 보게 만든다. 썩 불편한 영화지만, 어려운 문제를 어렵지 않게 다룬 봉준호 감독의 연출력에 경탄하게 된다. 더불어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이 날카로운 유머가 가득하다. 특히 <옥자> 속 블랙 코미디는 '육식'이라는 그리 달갑지 않은 주제 속에서도 계속 피식피식 웃음을 터지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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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란
씨네리와인드 객원취재부 기자단 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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