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워지지 않는 구멍을 지니고 사는 모든 이들에게

류수연 | 기사승인 2021/08/12

메워지지 않는 구멍을 지니고 사는 모든 이들에게

류수연 | 입력 : 2021/08/12 [09:35]

▲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스틸컷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씨네리와인드|류수연 리뷰어] 브로콜리 너마저의 곡 중 <졸업>에는 아주 멋진 가사가 나온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던 학창시절, 조그만 생채기에도 자주 눈물이 났었던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뾰족한 시간 위를 걸어가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곳에서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쳤다고 말해주는 노랫말에 위로받으며. 문득 돌아보니, 제법 물렁한(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난 결코 단단해지고 싶지 않다.) 어른이 되었지만 바람이 세차게 흔들릴 적이나 장마가 올 것 같이 인생에 습한 날이 이어지면 이 노래를 마음 속으로 흥얼거리곤 한다. 이 미친 세상에, 바람이 나를 향하게 만드는 그곳이 어디든, 나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세상에 상처 없이 이 기나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견디기 힘든 인생의 한 길목을 버텨 나가려 애쓰는 팻과 티파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포스터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정신 병원에서 퇴원 준비를 하는 팻으로부터 시작된다. 결혼식 테마 송을 틀어놓고 아내가 직장 동료와 바람피우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한 팻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상대 남성을 심하게 폭행한다. 이후 자신의 결혼식 노래만 들으면 이성을 잃게 되는 팻은 조울증과 망상장애를 진단받고 8개월 간의 입원 치료를 마친 뒤 부모님 집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전처 니키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 믿는 팻은 니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자가 되기 위해 조깅을 하고, 니키가 가르치는 책을 읽는 등 갖은 노력을 하지만 접근 금지 명령을 지키라는 말만을 주변에서 듣게 된다. 그의 일상은 니키를 되찾기 위한 망상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고 사태는 절친한 친구의 처제인 티파니를 만나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팻과 마찬가지로 티파니 또한 마음에 깊은 구멍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인물로,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 밀려드는 죄책감과 외로움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같은 회사에 다니는 모든 이들과 잠자리를 가지게 되고 이 일로 인해 해고를 당한다. 이후 저녁 식사 자리에 팻과 만난 티파니는 기민한 눈으로 (서로를 경멸하며) 각자의 마음에 깃든 상처를 알아차린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이들이 지니고 있는 구멍은 너무나 크고 흉측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에 구멍은 티파니와 팻의 남다른정체성이 되어버린다. 동네의 이름난 미친 ‘X 되어버린 팻과 티파니.

 

▲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스틸컷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이었을까티파니는 팻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 속에서 자꾸만 홀로 남겨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비슷한 상처를 지닌 팻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는 티파니. 그러나 팻은 니키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티파니에게 또 다른 구멍을 안겨주고 만다. 나는 너와 같지 않다고 무심히 내뱉는 팻을 향해 티파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게 나고, 나는 그런 나를 사랑해요. 당신도 같다고 말할 수 있나요?
용서할 수나 있어요?”

 

우스운 점은 이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몰래 선을 긋는 다른 모든 이들도 마음에 크고 작은 구멍을 몇 개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아무렇지 않은 척, 눈앞의 구멍이 보이지 않는 척할 뿐이다. 티파니와 팻이 이들과 다른 유일한 점은 각자에게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다는 것을 가리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를 무참히 덮친 파도가, 가슴을 찢어놓는 칼바람이 홀로 감당해내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애써 숨기지 않는다. 단지 그뿐이다여러 차례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후벼 파기도 하지만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서로가 구멍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진심을 다해 지켜봐 준다. 영화를 유심히 보다 보면 팻과 티파니가 마주칠 때 티파니 혹은 팻의 둥근 정수리 끝선 뒤로 해가 비치는 것이 보일 것이다. 팻과 티파니가 조깅을 할 때 언제나 지는 해가 이들을 비추고 있으며, 팻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듯 어지러운 카메라 워크 사이에도 어둔 밤중의 길을 티파니와 팻이 함께 걸어갈 때 이들 뒤로는 밝은 조명이 자리한다. 마치 흐린 구름 뒤로 실버라이닝이 이들을 비추는 것처럼.

 

▲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스틸컷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이 영화는 코미디적 상황이 이어지고 주인공들의 사랑이 결국엔 결실을 맺는다는 점에서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을 선덕하게 만들고 휙- 떠나버리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와는 조금 다른데, 영화를 보는 많은 이들이 극 후반부에 팻이 티파니에게 편지를 읽어주는 장면에서

 

당신이 (나를 위해 니키인 척) 그 편지를 써준 걸 알아요.
미친 나를 위해 미친 짓을 해줘서 고마워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실은 사랑의 결실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용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쉽게 용기를 거론하기 때문에 실제로 용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평가절하한다. 우리를 삼켜낸 구멍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고, 저 심연에 묻어둔 아픔을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며, 때론 부끄럽고 때론 나약하고 비겁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구멍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 또한 엄청난 용기가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다. 생은 고해의 바다이고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난파된 조각배 하나를 타고 헤쳐나가는 일은 용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나긴 고통의 연대기 속에서 마침내 팻이 마음의 구멍이 전하고자 하는 바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그는 망상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이를 얻을 기회를 현실에서 가지게 되는 것이다

 

▲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스틸컷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우리가 결핍을 치유할 수 있을까? 그건 아마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때론 평생을 가곤 하니까. 다만 장담할 수 있는 건 인생엔 슬픈 일만 일어나지도, 기쁜 일만 일어나지도 않는다는 것. 바람이 만들어 낸 너울이 어떤 날은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도, 어떤 날은 한없이 아름답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 이 예측 불가능한 시간 속에서 어떤 시간은 우리에게 메울 수 없는 깊은 구멍을 남기고 떠나지만 어떤 시간은 소중한 누군가를 만나 내게 구멍이 있다는 걸 잊어버리게 하는 순간이 오게 한다는 것. 그러니까, 세상이 혹은 우리가, 어쩌면 미쳤을지 모를 일이지만 해풍이 부는 바다 위로 이따금 실버 라이닝이 비출 때,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만끽하며 춤을 추면 될 일이다. 그렇다. 인생은 붉은 조명 아래 추는 한 판의 춤이다. 어떤 이는 10점 짜리 탱고를 추고 어떤 이는 4점짜리 막춤을 추겠지만 사실 몇 점인 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이 세상에 행복해질 자격이 그저 주어지는 존재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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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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