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김초희 감독

한지나 | 기사승인 2021/09/24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김초희 감독

한지나 | 입력 : 2021/09/24 [10:45]

▲ '찬실이는 복도 많지' 포스터  © 찬란

 

[씨네리와인드|한지나 리뷰어] 어떻게 영화할 것인가. 많은 영화인이 평생에 걸쳐 해결해야 할 숙제 중 하나다. 내 삶에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녹아 들게 할 것인가. 나는 영화를 내 중심으로 끌어올 것인가. 아니면 주변부에 둘 것인가.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를 중심에 두고 살아 온 빛나는 열매 찬실이의 이야기다. 예술 영화를 찍는 감독 밑에서 오랫동안 PD로 일해 온 찬실이는 갑작스러운 실직을 겪게 된다. 바로 감독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인해. 함께 있던 술자리에서 감독은 사망했고 믿었던 대표는 찬실이를 믿지 않았다. 돈도 남자도 직업도 없는 찬실이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일까?

 

실직 이후 함께 일하던 배우 소피의 가사도우미로 취직한 찬실은 영화를 중심에 놓고 살아 온 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습관처럼 해 온 영화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나는 정말 영화와 함께 살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마흔이 되어 던져본다. 소피의 집을 치우고 쓸고 닦으며 찬실은 자신의 마음도 정리해본다. 하지만 평생을 바쳐 온 영화를 정리한다는 결정이 그리 쉽게 내려질리는 없다. 심지어 정리를 방해하는 장국영의 등장까지. 찬실은 <아비정전> 속 장국영처럼 흰 민소매 차림에 머리를 넘긴 남자를 보고 미친 남자가 아닐까 의심한다. 본인을 장국영이라 칭하는 이 남자는 찬실에게만 보이는 귀신 같은 존재. 장국영은 찬실의 마음속 영화를 향한 애정이 똘똘 뭉친 유기체와 같다. 찬실의 마음을 깊게 돌아보게 만들고 영화를 계속해서 돌아보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한다.

 

▲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컷  © 찬란

 

찬실이 영화를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장국영뿐이 아니다. 쌀쌀맞은 줄로 알았지만, 밥을 차려주고 한글을 공부하는 주인집 할머니와 찬실은 점차 정서적 교감을 이뤄간다. 이후 할머니의 죽은 딸이 쓰던 영화로 가득한 방에 출입하게 된다. 영화를 단념하려 까지 마음을 먹었던 찬실이지만 세상이 마치 자신에게 영화를 놓지 말라고 붙잡는 것만 같다. 영화는 이처럼 러닝타임 내내 현실의 쌀쌀함을 그려내면서도 어딘가 따스한 분위기를 고수한다. 10년 만에 안겨본 남자 영도 그렇다. 비록 쌍방의 사랑은 아니었지만 찬실의 마음을 녹이는 난로를 자처했다. 찬실의 집을 찾아와 밤길을 함께 걷는 후배들까지 찬실의 곁에는 영화를 붙잡으라는 외침으로 가득하다.

 

▲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컷  © 찬란

 

끝내 찬실은 영화를 중심에 둔 삶을 선택한다. 그런 찬실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것은 장국영이다. 찬실에게 처음 영화를 하려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망각을 선물한다. 그간의 고생과 현실이 다 잊히는 망각. 그렇다. 결국 그간의 과정을 망각하는 찬실에게는 복이 있다. 망각하고서 꿈을 시작하던 첫 마음을 기억하는 찬실은 복으로 가득하다. 날 서고 냉담한 망각이 아닌 포근하고 부드러운 망각이니 말이다. 어쩌면 꿈을 놓지 않을 용기는 망각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바보처럼 다 잊고서 또다시 매진할 수 있는 사람은 건실하고 존경스럽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따스한 망각의 바람이 불기를 소망하게 만드는 영화다. 복이 많은 찬실이가 넘쳐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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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2021.09.2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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