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나사로 통해 진정한 행복 말하는 우화, '행복한 라짜로'

[프리뷰] 영화 '행복한 라짜로' / 6월 20일 개봉예정

김준모 | 기사입력 2019/06/19 [14:04]

현대판 나사로 통해 진정한 행복 말하는 우화, '행복한 라짜로'

[프리뷰] 영화 '행복한 라짜로' / 6월 20일 개봉예정

김준모 | 입력 : 2019/06/19 [14:04]

▲ <행복한 라짜로> 포스터.     © (주)슈아픽처스



신약 요한복음 11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 중 하나인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예수의 음성을 듣고 되살아났다는 이 이야기는 신의 아들 예수가 지닌 전지전능함과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구절에서 모든 감정을 초월한 신이 아닌 인간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예수의 기적으로 부활한 나사로가 이후 행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나사로의 부활은 사제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체포하고 처형할 결심을 굳히는 사건이 되었고 그들은 예수의 능력을 목격한 나사로도 죽이려고 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의 말대로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될 일의 전조인 영혼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감정을 지닌 한 명의 인간, 나사로에게 과연 이 기적의 순간이 행복했는지는 물음표로 남는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아름다운 시골 마을 인비올라타를 배경으로 순수하고 착한 마음씨를 지닌 청년 라짜로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을에서 일하던 라짜로가 겪은 일들

 

공동으로 담배를 경작하고 공동으로 생활을 하는 아름다운 시골 마을 인비올라타의 청년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는 남을 돕는 걸 최우선으로 여기는 순박한 청년이다. 그는 마을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한다. 마을 사람들은 후작 부인을 위해 일을 하지만 매년 수확량이 부족해 빚만 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후작 부인의 아들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가 마을에 나타난다. 그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못마땅하다. 그들이 계급과 현실에 저항하길 바라는 탄크레디에게 마을 사람들이 시키는 일을 불만 없이 수행하는 라짜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 <행복한 라짜로> 스틸컷.     © (주)슈아픽처스

 

탄크레디는 라짜로를 통해 납치극을 꾸민다. 어머니인 후작 부인에게 자신의 몸값을 받고 그 돈으로 마을 사람들을 해방시킬 계획을 꾸미는 탄크레디는 라짜로가 지내는는 산기슭의 공간에 머무른다. 그는 부모님의 존재를 모르고 할머니만 있다는 라짜로에게 우리 아버지는 같은 난봉꾼이었을 거라며 우리는 형제라 말한다. 한편 탄크레디의 납치에 후작 부인의 집에서 일하는 시녀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이 신고는 마을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한편 열병에 걸린 라짜로는 비틀거리며 탄그레디에게 향하던 중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다시 눈을 뜬 라짜로는 텅 비어버린 마을에 당황한다. 

  

<행복한 라짜로>는 신약 요한복음의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라짜로는 나사로의 부활처럼 다시 눈을 떴고 그의 앞에는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 이 다른 세계가 주목하는 감정이 '행복'이다. 인비올라타는 무임금과 강도 높은 노동, 후작 부인을 위해 일하는 계급 사회라는 점에서 자유와 평등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다. 다시 눈을 뜬 라짜로는 자유와 평등을 얻게 되지만 이 자유와 평등이 과연 행복인가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인비올라타에서 라짜로는 본인이 지닌 순박함 때문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많이 이용당하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이런 위치 속에서 자신 때문에 행복해 하는 사람들, 자신을 집단의 일원으로 받아주는 마을 사람들에게 행복을 느낀다. 반면 돈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라짜로에게서 행복을 앗아간다. 이런 라짜로의 모습은 두 가지 소재를 통해 그 슬픔의 감정을 강화시킨다. 

   

'행복한' 라짜로 통해 '불행한' 현대인 조명하는 영화 

 

▲ <행복한 라짜로> 스틸컷.     © (주)슈아픽처스

 

첫 번째는 늑대이다. 성경에서는 늑대를 이리로 해석하는데 이 늑대는 양과 대비되는 부정적인 존재, 거짓목자 노릇을 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삯꾼목자를 의미한다. 극 중 라짜로는 마을에서 양을 돌보는 일을 한다. 하지만 절벽에서 떨어진 그를 깨우는 건 늑대이다. 나사로가 예수의 음성을 듣고 깨어난 것과 달리 라짜로는 늑대에 의해 깨어난다. 그리고 그가 돌보던 수많은 양들은 사라지고 없다. 

  

늑대가 깨운 세상은 돈이 우선이며 개인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신분사회의 모순과 봉건제의 폐지는 인류에게 자유와 평등을 선물했으나 돈이라는 존재는 또 다른 계급과 인간의 존재가치를 격하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이런 현대사회의 문제가 외로운 늑대를 낳았음을 작품은 보여준다. 늑대는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이다. 인비올라타에서 라짜로와 탄크레디가 장난으로 늑대 울음소리를 낼 때 늑대는 무리지어 울음에 답을 한다. 

  

반면 인비올라타 밖의 늑대는 혼자 돌아다닌다. 이런 늑대의 모습은 인간됨을 버린 채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그러다 결국 혼자가 되어버린 현대인들의 초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는 새총이다. 새총이라는 소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탄크레디와 라짜로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라짜로에게 탄크레디는 마치 예수처럼 비춰진다. 그는 인비올라타 마을 사람들의 해방을 꿈꾸는데 이는 구원처럼 다가온다.

 

▲ <행복한 라짜로> 스틸.     © (주)슈아픽처스

 

또 그가 라짜로에게 보여주는 관심, 지배계급이 하층계급(그 중에서 가장 낮은 라짜로에게)에게 보내는 사랑과 애정은 예수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새총은 탄크레디가 라짜로에게 한 선물이라는 점, 라짜로가 처음부터 끝까지 품고 있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새총하면 떠오르는 성경의 이야기 중 하나가 다윗과 골리앗이다. 거대한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의 돌팔매는 새총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새총은 다윗의 돌팔매처럼 거대한 적을 쓰러뜨리고 고통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는 상징을 담고 있다. 하지만 라짜로는 이 새총을 제대로 사용도 하지 못한다. 현대의 자본주의와 인간소외라는 골리앗은 더 이상 다윗이라는 언더독에게 지지 않으며 그들이 원하는 행복을 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란 것을 작품은 보여준다. 이런 <행복한 라짜로>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비리디아나>이다. 

  

거지와 부랑자들을 모아서 신앙심을 통해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비리디아나의 모습은 성자(聖者) 그 자체이다. 하지만 비리디아나를 비롯한 집주인들이 집을 비우자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종교를 희롱하는 거지와 부랑자들의 모습을 통해 작품은 풍자를 시도한다. 영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해 거지와 부랑자들이 난장판을 피우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인간이 지닌 본성을 보여준다.

 

▲ <행복한 라짜로> 스틸컷.     © (주)슈아픽처스

 

동시에 영화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과연 성령과 성자의 힘만으로 모든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과연 현대에 예수가 재림한다 하더라도 이런 추악하고 추잡스런 본성을 지닌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행복한 라짜로>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구원을 경험한 나사로처럼 수많은 혁명을 통해 자유와 평등이라는 구원을 얻어낸 현대의 인간은 과연 행복한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현대의 나사로인 라짜로는 과연 진정한 행복을 얻은 것일까. 자유와 평등에 기반을 둔 제도와 구조는 인간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걸까. 현대 사회에 기적과도 같은 진정한 구원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심도 있게 던진다. 수채화 같은 영상과 환상성을 지닌 이야기가 주는 신비함 속에 현대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우화의 형식으로 담아낸 이 작품은 '행복한' 라짜로를 통해 '불행한' 현대인을 조명하는 아름다움과 슬픔이 공존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씨네리와인드 김준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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