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며 조언하려드는 이들에게

Review|'녹색광선'(1986)

오채림 | 기사승인 2021/05/03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며 조언하려드는 이들에게

Review|'녹색광선'(1986)

오채림 | 입력 : 2021/05/03 [09:05]

 

▲ (영화 '녹색광선' 스틸컷.) 

 

[씨네리와인드|오채림 리뷰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내가 한창 우울한 일을 겪던 시기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라며 변화와 극복의 방법을 제시하고는 했다. 소극적인 태도는 적극적이게 바꾸고, 우울한 생각들은 긍정적으로 떨쳐버리라며 말이다. 하지만 정작 힘든 시기를 극복했을 때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건 나를 위한다던 변화와 극복의 조언이 아닌, 그저 내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한 사람의 인정이었다. 날 위해서 한 말이라는 그들의 조언은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일까. 올바른 조언의 방법이란 무엇일까. 이 영화 <녹색광선> 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게 한다.

 

▲ 영화 '녹색광선' 스틸컷.

 

<녹색광선>의 주인공 델핀은 오랫동안 계획했던 휴가를 나가기 직전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던 친구에게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는 전화를 받는다. 그녀 주변의 다른 친구들은 휴가를 같이 보낼 새로운 사람을 구해보라며 부추기지만 소극적인 델핀은 여행을 혼자 떠나고 싶지는 않아하면서도 새로운 사람을 구하기는 꺼려하는 인물이다. 델핀은 결국 친구들의 말에 따라 언니의 고향 집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 즐겁게 여행하고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듯해 보이지만, 마음 한 편에는 우울함이 가시지 않는다. 겉도는 것 같은 자신에게 우울하기만 하다. 그녀는 홀로 떠난 여행에서 남자들과 어울리게 되지만 불편함을 느끼고 결국 자신의 집을 향하는 기차역으로 떠난다. 모든 걸 포기한 채 떠나려던 델핀은 그곳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한 남자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함께 찰나의 녹색광선을 마주한다.

 

델핀은 내성적이고 우울하며 감정에 솔직해 어딜 가나 눈엣가시가 되는 인물이다.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파티 참석 기회를 만들어 줘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이거나, 사람들과 함께 하던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한다. 소고기 요리를 내어놓은 식사 자리에서 채식주의자라며 자신의 소신에 대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

 

▲ 영화 '녹색광선' 스틸컷.

 

 

제가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물론 틀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제 방식대로 음식을 먹어요.”

 

이 대사는 영화 <녹색광선> 속 델핀의 성격을 대변한다. 델핀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극적인 태도보다는 적극적인 태도가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이 옳다고 얘기한다. 마치 델핀의 소극적인 성격이 여행이 취소된 것에 대한 문제점으로 인식하게끔 하며 델핀이 느끼는 아픔이나 슬픔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른 게 아닌 틀리다 인식하는 것이다. 델핀이 채식주의자라며 자신의 신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의 주변인들은 과거에 고기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으나 현재는 아무렇지 않다며 조언을 늘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의견 속에서도 델핀은 날 어떻게 하려고 들지 마. 난 우울하지 않아.” 라며 자신만의 감정대로, 길을 걸어 나간다. 현실 속에서 조언이라는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로 인해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길 바라는 솔직한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 영화의 델핀이라는 인물은 영화에서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이 입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델핀은 일반적인 영화에서 볼 법한 캐릭터가 아니다. 긍정적이고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소위 전형적인 주인공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솔직하기는커녕 아일랜드에 놀러 가기로 한 약속을 싫다며 거절해 놓고도 거절한 자신을 바보 같다며 자책하기도 하고 남자 친구를 구할 수 있길 바라면서도 자신의 소극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과 만남의 상황이 주어져도 회피하고 만다. 태연한 척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순된 감정들을 보인다는 것이다. 캐릭터의 모순된 감정이라 하면 관객들로 하여금 혼란을 느끼게 만들고 납득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영화 속 델핀은 그녀의 솔직한 표정과 행동을 감정 그대로 드러내며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이러한 자연스럽고도 입체적인 인물상은 감독 에릭 로메르의 영화적 신념과도 연결된다. 대부분 아마추어 배우들을 섭외해서 그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보다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해 낸 것을 의도적으로 연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대부분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소극적이고 우울한 감정들과 상처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감정들, 현실에 회피하고 싶은 어딘가에 실존할 것만 같이 숨 쉬고 있는 우리 마음속 델핀을 만들어 냈다.

 

녹색광선에는 하나의 매개체인 녹색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델핀은 녹색에 관해 불길한 징조가 계속되는 것이라며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델핀은 바닷가 옆을 지나가던 여인들의 녹색광선에 대한 대화를 엿듣고 녹색에 대한 생각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들이 말하는 녹색광선이란 하나의 행운이자 사람과 만남을 상징했다. 녹색광선을 보았을 때 상대방에 대한 관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행운의 의미였던 것이다. 델핀의 녹색에 대한 징조는 한 남자와 만남으로까지 이루어진다.

 

▲ 영화 '녹색광선' 스틸컷.

 

여행 중에 사람들과 마주해야 하는 상황을 회피하고 자신의 집이 있는 파리로 향하기 위해 바이리츠역에 도착한 델핀은 그곳에서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게 된다. 델핀은 무언가에 홀린 듯 자신이 읽던 책을 빌미로 남자에게 말을 걸고 솔직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남자는 델핀의 주변 사람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조언이나 변화를 권하지 않고 신념에 대해 지적하지 않는다. 델핀은 남자의 반응에 낯설어하면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그에게 차차 마음을 열게 된다. 델핀은 남자에게 선뜻해가 지는 모습을 보지 않겠냐며 제안하고 두 사람은 해가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기 직전, 찰나의 눈부신 녹색광선을 맞이하며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조언하려 들지 않는다. 소극적이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한 사람을 만나게 함으로써 안도감과 편안함이 있는 결말을 보여 줄 뿐이다. 델핀은 변하지 않았다. 단지 혼란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며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어갔다. 녹색광선은 델핀의 뼈아픈 성장기가 아닌, 델핀이 인정받는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녹색광선이 찾아왔을 때 그녀의 환호성은 남자의 진심을 확인해서 들었던 행복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녹색광선을 마주할 수 있어서일까. 우리에게도 나 자신을 그대로 인정해 줄 누군가와의 만남, 그리고 녹색광선을 맞이할 날이 오기를 기대해보며, <녹색광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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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림
씨네리와인드 객원취재부 기자단 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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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2021.05.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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