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김진석이 우울증에 걸렸대(4)

4화 - 늦가을 나비가 펄럭일 때

김준모 | 기사승인 2021/05/18

[단편/소설] 김진석이 우울증에 걸렸대(4)

4화 - 늦가을 나비가 펄럭일 때

김준모 | 입력 : 2021/05/18 [10:00]

-우리가 함께한 시간만 5년이야. 네 룸메이트라서 더러운 꼴 다 본 게 나라고. 우리 휴학도 같이 하고 유럽여행 갔잖아. 그런데 네 기분이 어떤지 내가 모르겠냐? 무슨 일인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앞에 죽상인 건데?

 

일 년에 한 번 학부시절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를 앞두고 미진은 감정을 조절했다. 출퇴근길 마다 댄스음악을 들었고, 점심시간이면 명지보다 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밤새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내일 하루는 즐겁게 보내자고 생각했다. 새벽에 컵라면을 먹으러 나온 진석이 아니었다면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시끄러운 소리에 부엌을 향하니 바닥에는 컵라면이 엎어져 있었다. 진석은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라면 하나도 제대로 못 끓인다고. 미진이 라면을 끓이는 동안 남편은 공원에서의 그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사흘간 쌓아올린 웃음의 성은 뒤늦게 재료가 모래임이 들통 나며 무너졌다. 무너진 성의 자리는 파도를 타고 온 눈물이 차지했다.

 

-그러니까 그 인간이랑 결혼하지마라고 했잖아. 내가 자기 때문에 얼마나 자취방에서 나가줬는데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었다니까. 툭하면 찜질방 가서 피부가 온통 쭈글쭈글해진 거 생각하면 아직도 분통이 터진다.

-지금 그 얘기해서 뭐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다람쥐 같은 눈을 가진 다은의 눈에는 미진의 두 가지 변화가 들어왔다. 첫 번째는 검은 생머리를 뒤로 묶은 헤어스타일이었다. 금발에 보이시한 짧은 머리를 유지했던 미진은 팔에 했던 타투도 팔토시로 가렸다. 두 번째는 눈빛이었다. 미진이 사랑에 빠진 걸 처음 눈치 챈 건 다은이었다. 불면증으로 잠을 거의 자지 못하는 미진의 눈은 매사 피로로 가득해 동기들은 말을 거는 걸 미안해했다. 사랑을 의미하는 눈웃음이 본 적 없는 슬픔의 우물에 빠진 걸 본 순간, 다은은 핑계를 대고 모임을 파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미진을 잡아 근처 카페로 데려왔다.

 

-주말에 회사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왔어. 이사님이랑 감독님이 오셨는데, 방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 거야. 열쇠로 문 따고 들어갔어. 나오라니까 싫대. 당신한테 강요하거나 부탁하는 거 없을 테니까 얼굴이라도 보라고 했어. 걱정해서 찾아온 사람들 돌려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두 분이서 휴가비라고 봉투를 주더라. 제주도라도 가서 쉬고 오라고. 그런데 갑자기 화를 내는 거야. 자기한테 왜 그러냐며 소리 지르더니 봉투를 집어 던지더라고. 나한테 쫓아내라더니 방에 들어가 또 문을 잠그더라. 그분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더라. 언제까지 남들한테 미안해야 할까. 나 지금 너무 답답한 거 있지.

 

아메리카노에 담긴 얼음을 씹으며 머리를 식힌다. 다은은 귀로 들은 정보를 정리한다. 김진석이 우울증에 걸렸다. 이유는 모른다. 알면 미진이 카페 앞에서 펑펑 울지도 않았겠지. 김진석은 예전처럼 백수가 아니다. 저예산으로 자기가 찍고 싶은 영화를 찍는 감독도 아니고. 어엿한 상업영화 감독이 되었는데 그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한 것이다. 인터넷에 영화공장을 검색해 보니 본 적도 없는 영화들이 수두룩 등장한다. 기억의 한 구석을 긁어보니 선배 택호가 이곳을 인수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진석만 믿고 샀다가 적자만 보고 있다고. 그런 곳에서 받은 투자니 눈에 불이 켜질 만하고, 눈물이 굵게 떨어질 만하다.

 

-미진이 너, 잘 들어. 내가 괜히 김진석이랑 사귀는 거 말린 게 아니야. 그 오빠, 진짜 정상이 아니야. 우리 1학년 때 기억나? 자기 책 냈다고 과방에서 팬사인회 했잖아. 그 책을 누가 사고, 누가 사인을 받겠냐고! 그 인간은 나르시시즘 환자야. 가장 좋아하는 작가에 자기 이름 적어 냈잖아. 보나마나 영화작업 하면서 누가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했겠지. 자기 자존심 건드리니까 화가 나서 안 간다고 생떼 부리는 거야.

 

다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진석은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자신을 리얼리스트라고 했다. 30이 넘게 작가 꿈만 쫓아다닌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택호도 말했다. 형은 몽상가지 리얼리스트가 아니라고. 진석은 단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다며 후배를 꾸짖었다.

 

-직장에서 돈 벌면 그게 다 리얼리스트야? 꿈을 이루지 않고 타협 본 사람을 리얼리스트라고 칭하느냐고. 자기가 현실에 있어야지. 세상이란 무대에 내가 주인공으로 실재해야 그게 리얼리스트라고.

 

개소리. 택호의 말에 미진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도 그랬다. 20대에 가을낙엽을 밟던 날, 미진은 과방에 아무도 없는 걸 보고 황당했다. 매일 문을 열 때마다 왁자지껄했던 공간에는 손에 마커펜을 쥔 남자가 고개를 책상에 박고 잠을 자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남자는 짙은 쌍커풀에 진한 눈썹을 지니고 있었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지던 그는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 드디어 내 팬이 한 명 왔네. 이름이 어떻게 되니? 팬이니 이름 정도는 외워줄게.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앳된 얼굴에 비해 키가 컸다. 과방 문을 열고 나가려고 마음먹은 순간 남자는 어느 새 미진 앞에 와 있었다. 그는 전공서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 난 또. 이게 내 책인 줄 알았지. 봐봐, 표지가 비슷하지? , 나 졸업하고 유명해지면 어쩌려고 한 명도 안 오냐.

 

국문학과에 오면 글을 쓰는 선배들을 많이 만날 거라 생각했다. 선배들의 조언은 하나였다. 공무원 준비를 하거나 중국어 배워라. 문예창작과나 문화콘텐츠과도 아니고 여기서 글 써봐야 가능성이 없다. 우리 대학 정도면 좋은 대학 아니냐는 말에 그래서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거라는 답을 들었다. 그리고 꼭 한 마디 덧붙였다. 자꾸 글 쓰려고 하면 학교에 있는 지박령처럼 된다고. 그 지박령은 무조건 피하라고. 그날, 그 지박령을 만난 것이다.

 

-, 나보다 후배일 테니까 말 놓을게. 내가 혹시나 해서 책을 몇 권 가져왔는데 이놈들 어떻게 알았는지 한 놈도 과방에 안 오더라. , 돈은 됐고, 읽고 좋으면 SNS에 짤막하게 홍보 좀 해줘. , 나쁘면 안 써도 되고. SNS 하지?

 

자가출판한 시집의 제목은 <먼저 사랑할 수 있는 용기>였다. 표지를 넘기니 내지에 사인이 보였다. ‘부족하지만 웃음을 줄 수 있다면, 언제든 쓰리라라는 문구에 호기심이 생겼다. 모두가 사인을 받기 싫어하는 선배, 교수들도 따로 언급하지 않을 만큼 상대하고 싶지 않은 선배, 그 선배의 글에 미진의 눈은 반달 웃음으로 변했다.

 

김준모
씨네리와인드 미디어본부 기획취재부
rlqpsfkxm@cinerewin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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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2021.05.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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