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변명의 책임자를 찾습니다

Review|'실미도'(2003)

최나윤 | 기사승인 2021/07/12

비겁한 변명의 책임자를 찾습니다

Review|'실미도'(2003)

최나윤 | 입력 : 2021/07/12 [16:00]

[씨네리와인드ㅣ최나윤 리뷰어] 실미도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다. 낙오자는 죽인다. 죽이지 않더라도 알아서 죽는다. 낙오의 기준은 실미도가 정한다. 

 

그들의 신조를 토대로 관점을 바꾸어보자. 684부대가 더는 필요 없어진 국가의 입장에서 실미도는 낙오자의 섬이다. 섬 안에서의 상하관계와 철칙은 고작 낙오자들끼리의 진흙탕 싸움에 불과했다. 영화 「실미도」는 약육강식의 세계, 저 아랫 사람들의 이야기다. 

 

▲ <실미도> 스틸컷  © 시네마서비스

 

변명의 사다리

 

인찬은 나라의 임무에 복종하는 재현에게 "비겁한 변명입니다!"라며 절규한다. <실미도>의 명대사라 꼽히는 이 대목은 영화 전반을 관통한다. 영화 자체가 비겁한 변명의 향연이다. 재용과 원희는 여성을 강간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하여 자기변명을 하기 바빴다. 그들의 단독 행동으로 동료들이 몽둥이질당할 때, 원희는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며 되려 뻔뻔하게 소리친다. 좀 더 윗선으로 올라가 보자. 훈련병과 기간병의 죽음을 건 대치 속에서 박 중사는 벼랑 끝까지 몰린다. 밑바닥 계층인 훈련병과 자신들이 어떻게 같냐며 저도 모르게 진심을 토해낸 그는 어떻게든 수습하려 발버둥 친다. 결과는 따발총 세례와 죽음이었다. 한편 재현은 오국장을 찾아가 684부대의 존재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게 해 달라 부탁한다. 그러나 오국장은 국가의 안보를 내세우며 재현의 부탁을 완강히 거절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행위에 완벽한 자유의지란 없다. 제 탓이 없다. 이 모든 것은 자기 의지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환경과 거역할 수 없는 윗사람의 탓이다. 그들은 저도 피해자라 말하거나 모르쇠를 일관하며 책임의 폭탄을 돌린다. 그들의 손가락은 한 없이 '위'만 가리킨다. 성욕을 풀 기회도 안 준 상사들의 탓이고, 684부대를 정리하게 만든 중앙정보부의 탓이며, 그들을 만들게 한 '국가'의 탓이다. 이 영화에서 "국가의 명령이야!" 따위의 말들은 마치 '무지개 반사'처럼 끝판을 알리는 무기이다.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말이다. 그러나 <실미도>에는 그들이 그토록 울부짖던 '국가'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형태 없는 국가는 어떠한 말도 없다. 그저 피해자만 허다해질 뿐이다. 

 

오국장은 재현에게 총을 겨누고 이런 말을 한다. "권력을 가진 자가 의지를 갖고 결정을 하고 명령을 내린다. 그것이 국가의 명령이다" 결국 이 영화는 국가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빌려 힘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견고한 수직관계에서 '어쩔 수 없어지는' 행위들, 이해를 바라는 잔인함은 계속해서 아래를 향한다. 까마득한 아래에서는 책임을 물을 위가 더는 보이지 않는다. 

 

▲ <실미도> 스틸컷  © 시네마서비스

 

이름의 의미

 

동양에서 이름은 존재 자체를 나타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유바바에 맞서 이름을 지켜낸 센이 그러했고, 이름을 불렀을 때 비로소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꽃>이 그러했다. 대중가요에도 '네가 있던 미래에서 내 이름을 불러줘(아이유 '너랑 나')라며 이름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려는 가사가 나온다. 가만보면 이름의 유무만큼이나 누구에게 이 이름이 불리느냐도 중요한 듯하다. <실미도>도 이름에 관한 이야기이다. 훈련병들은 이름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다. 자신의 이름을 지키려는, 또 이름으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처절한 발버둥이었다.

 

사형수였던 그들에게 나라는 죽음을 명했다. 그리고 형장의 이슬이 될 뻔한 그들을 다시 건져 올렸다. 나라는 사형수를 비롯한 밑바닥 청년 31명에게 684부대라는 새 인생,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김일성의 목을 따라는 뚜렷한 삶의 목적까지 부여해주었다. 훈련병들에게 국가는 분명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 훈련병들은 나라의 부름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가진 채 그들이 불러줄 이름을 기다렸다. 상필은 684부대가 국립묘지에 묻힐 줄 알았다고 했다. 그들의 죽음 위에 나라가 인정한 이름이 새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훈련병들의 주민등록을 말소시킨 지 오래였다. 그들의 이름은 진작에 사라졌다.

 

훈련병들은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었던, 누구보다 먼저 이름을 불어주어야 했던 존재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러나 극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직접 그 시작점을 향해 달려간다. 종국엔 자신을 죽이고 살린, 그리고 다시 죽일 '국가'를 만나지 못하고 자폭을 결심한다. 애석하게도 그 역시 다시 태어난 그들이 국가로부터 배운 조항의 일부였다(체포되면 자폭하라). 684부대는 묘비 대신 마을버스에, 국가 대신 자신의 피로 스스로의 이름을 새긴다. 국가가 아닌 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 <실미도> 스틸컷  © 해리슨앤컴퍼니

 

<실미도>는 분명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자 한 청년들과 그들을 책임지지 않은 국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는 힘에 의한 강압적인 수직관계가 다양하게 제시된다. 사회적 권력으로 재정렬된 뚜렷한 먹이사슬은 당시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까라면 까' 식의 사회구조 안에서 구성원들은 도덕적 성찰이 가능한가? 필히 달라졌어야 할 현재를 돌아봤을 때, 우리는 과연 이 영화가 제시한 힘의 구조에서 완벽히 자유로운가? 사회에 의한 희생이 곧 개인에 의한 희생을 만들어내는 촘촘한 거미줄 같은 비극은 빠져나갈 구멍도 보이지 않는다. 희생에 대한 책임자가 부재한 사회는 절망적이기만 하다.

 

 

보도자료 및 제보cinerewind@cinerewind.com

최나윤
씨네리와인드 객원취재부 기자단 5기
cinerewind@cinerewind.com

Read More

  • Posted 2021.07.12 [16:00]
  • 도배방지 이미지

실미도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