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집어삼키는 초록의 끈적임

왕가위, 「아비정전」 (1990)

조유나 | 기사승인 2021/09/07

영화를 집어삼키는 초록의 끈적임

왕가위, 「아비정전」 (1990)

조유나 | 입력 : 2021/09/07 [09:55]

▲ '아비정전' 포스터.  © 디스테이션


[씨네리와인드|조유나 리뷰어] 왕가위 감독의 영화이자 장국영, 장만옥, 유덕화, 양조위 등 내로라하는 배우가 등장하는 영화 「아비정전」(1990)은 전반에 무거운 초록빛을 깔아 끈적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끈적함은 탐스러운 매끈함이 아닌 흘려보내고 싶은 골칫거리로 볼 수 있는데 영화 내내 이 진득함이 온몸을 덮어 육중한 무게를 부여해 인물의 감정선을 숨죽이고 바라보게 만든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꾸만 자신을 갉아먹는 것에 몰입하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공허와 좌절이 이들의 삶을 끈적이게 만든다. 그 끈적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과 벗어난 인물에 따라 그들의 초록빛은 비상구처럼 반짝이거나 돌 위에 이끼처럼 미끄러지게 만든다.

 

▲ '아비정전' 스틸컷.  © 디스테이션

 

아비의 일대기라는 의미를 가진 영화의 제목처럼 아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아비는 이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쾌락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매표소 직원으로 일하는 수리진과 댄서인 루루는 아비의 매력에 빠졌지만 그의 가볍고 미련 없는 태도에 상처를 받는다. 아비가 이러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엄마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새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아비는 그녀에게서 사랑보단 짐을 느끼기에 자신을 낳아준 진짜 엄마, 친모를 찾고 싶어 한다. 하지만 새엄마의 '그들이 정말 널 원했다면 진작에 데리러 왔겠지'와 '네가 너를 속이고 있다'는 말과 영화 말미에 친모가 아비를 팔아넘기는 장면을 통해 그의 친모 또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기보단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가 너를 속이고 있다'는 새엄마의 말처럼 아비 또한 자신의 친모는 자신을 그리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것을 부정할 뿐이다. 필리핀에서 친모가 사는 곳에 당도하지만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되돌아가는 것 또한 아비의 부정이 만들어 낸 결과이자 자신의 부정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아비는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사랑이란 그의 인생에 없는 사람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구애하는 사람을 그저 하룻밤의 쾌락으로 상대할 뿐 진지함을 내비치지 못한다. 그에겐 사랑의 진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 '아비정전' 스틸컷.  © 디스테이션

 

뒤를 쫓는 인물들

 

아비는 엄마로 표상되는 사랑의 진심을, 수리진과 루루는 매력적인 남자 아비를, 경찰관과 아비의 친구는 각각 수리진과 루루를 뒤쫓는다. 모든 인물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다. 아비는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엄마의 사랑을 대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그것을 갈망했다. 그렇게 그는 엄마의 사랑을 뒤쫓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리진과 루루는 아비를 뒤쫓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점도 보여준다. 수리진은 그를 그리워하며 괴로워하지만 그녀 앞에 나타난 경찰관과 대화를 하며 자신에게 남아 있던 아비를 향한 감정을 털어낸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아비의 행방을 따지러 온 루루를 향해 '이제 통곡할 사람은 당신이야. 나는 멀쩡하다고'라고 말하며 자신의 온전함을 설명한다. 그녀는 뒷모습을 좇던 길에선 탈선한 것이다. 루루는 아비를 잊지 못해 방황한다. 마지막에는 아비의 친구가 아비를 쫓아 필리핀으로 가라며 건넨 돈을 쥐고 울며 끝이 난다. 이후의 삶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지만 영화에서 그녀의 모습은 끝까지 아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착실히 그 길을 걷던 인물이었다.

 

▲ '아비정전' 스틸컷.  © 디스테이션

 

삶의 공허함

 

영화에는 유명한 대사가 등장한다.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에 꼭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이 대사는 아비정전, 즉 아비의 일대기를 집약하는 상징적인 대사이다.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아비의 인생은 다리 없는 새처럼 한없이 날아다니기만 한다. 그러다 마지막에 그는 전철에서 의미불명의 사람에게 총살을 당하는데, 이때가 그가 땅에 내려앉는 때이다. 아바는 누구에게서도, 어디에서도 안정과 온정을 느끼지 못하기에 쉼없이 걸어야만 했다. 그렇게 그가 쉴 수 있는 때는 죽음에 이르렀을 때였다.

 

자신을 미끄러지게 만들던 초록, 즉 떨치지 못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에서 비상구를 찾은 아비와 그런 아비를 잊지 못해 우는 루루는 영화의 끝까지 초록의 무게에 짓눌려 살았다. 그들과 다르게 아비와의 이별의 슬픔에서 벗어난 수리진과 그런 수리진을 짝사랑하다 자신을 진정한 꿈을 향해 떠난 경찰관이자 선원은 초록빛으로 번쩍이는 비상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괴로움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들을 성장하게 만들기도 더욱 좌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삶의 공허함과 그 공허를 멈춰 생각하지 못한 채 잡을 수 없는 것을 향해 날아가기만 했던 아비는 자신의 초록을 괴로움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결핍으로 보여준다. 다른 이들의 삶과 대조되거나 비교되어 그의 삶이 더욱 괴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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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나
씨네리와인드 객원취재부 기자단 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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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2021.09.0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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