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에도 한계가 있다면

「기생충」 의 다섯 가지 영화적 법칙 위배

전소현 | 기사승인 2021/12/07

'기생충'에도 한계가 있다면

「기생충」 의 다섯 가지 영화적 법칙 위배

전소현 | 입력 : 2021/12/07 [10:42]

<기생충> 비판 다섯 가지 법칙을 중심으로

 

▲ '기생충 : 흑백판' 스틸컷.     ©CJ엔터테인먼트

 

[씨네리와인드|전소현 리뷰어"기생충을 비판하기에 앞서, 더 큰 사회적 질타를 피하기 위해 <기생충>이 영화제 상을 받은 훌륭한 작품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그리고 필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을 동경해왔으며, 감독 개인의 역량에도 항상 감탄해온 바 있다. 다만 어떻게든 비평의 입장에서는 영화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하며, 철저히 영화를 까고 또 까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기생충>도 비판의 여지는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글쓴이"

 

본론으로 돌아와서, 잘 만든 영화에 대해 기대하는 다섯 가지 법칙이 있다. 첫째, 재현의 윤리를 어기지 않는다. 영화라는 장르는 찍고 붙이는 게 중요한데, 이때 어떻게 찍어서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재현의 폭력성은 확연히 달라진다. 둘째, 잘 만든 영화는 지역정치학을 반영한다.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수준의 영화보다, 그 영화가 제작된 국가만의 특수한 지역정치학이 반영되었을 때 그 영화의 값어치는 올라가기 마련이다. 셋째, 잘 만든 영화는 서구(할리우드)와 타 국가 간의 우위 관계를 전제해서는 안 된다. 영화 속에서 은근히 국가 간 위계질서를 표상하는 메타포는, 서구식 영화관을 고착화시키고 다른 국가들은 서구의 발 아래에 있음을 기정 사실화하게 된다. 넷째, 잘 만든 영화는 평등주의 시각에서 보편적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 과거의 남성주의적 시각이 영화에서 반영되는 순간, 그 영화는 구시대적 세계관으로 점철된 낡은 영화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다섯째, 잘 만든 영화는 뻔한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다. 감상 후의 오묘한 찝찝함을 남기며, 관객으로 하여금 결말과 교훈에 대해 곱씹게 해야 한다. 찍고 붙이는 데에 있어서도 예측불가한 논리가 전개 되어야 잘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생충은 이 다섯 가지 법칙을 모두 위반하였다는 점에서-칸 영화제 상을 수여했음에도 불구하고-비판된다.

 

첫째로, <기생충>이 비판 받아야할 지점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재현의 윤리를 어긴 것이다. 수직적으로 분화된 계급 사회를 폭력적으로 묘사했으며 특히나 빈곤층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야만적이기 때문이다. <기생충>에서 빈곤층과 상류층은 너무나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이 많다. 두 계층이 사는 집은 물론이고, 입는 옷, 먹는 음식, 사용하는 언어, 사고 방식과 몸짓 말투까지도 대조된다.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은 주로 주인공들의 행동 반경을 따라 무빙하는데, 주로 빈곤층을 내려다보는 상류층의 수직적 시각으로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카메라의 시선은 빈곤층이 상류층보다 사회적으로 한참 아래에 있으며, 그 계급을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을 극복하는 것은 어렵다는 폭력적 시선을 전제한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박사장의 집에서 기택의 반지하 집까지 가는 길도 이러한 지독한 계급 구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반지하 집으로 가는 길은 끝없이 펼쳐지는 내리막길, 내려가는 계단, 지하차도, 다시 육교 밑 계단 그리고 또 다시 내려가는 계단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은 기택의 가족이 빈곤층임을 단순하게 묘사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상류층은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거나 오히려 더 상승할 수도 있는 데에 반해, 계속 내려오고 있는 기택 가족의 모습을 통해 빈곤층은 끝도 없이 더 나락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러한 수직 하강적 시선을 카메라가 담는 동안, 관객인 우리는 편안한 의자에서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면서 영화를 보고 있다. 적당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방관하는 것이다. <기생충>에서 기택 가족은 집 안 전체에 폭우로 물이 차서 생존의 위협을 겪은 상황이었지만, 이 순간 우리는 기택 가족 뿐만 아닌 빈곤층 동네 전체의 고통을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안전한 거리를 둔채 구경하게 된다. 편안하게 치환해버리는 폭력성, 이것이 <기생충>이 위험한 이유다. 물론 고통을 아예 영화에 드러내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고통을 찍을 때는 안 찍어야 한다. 다시 말해 외화면을 활용해야 했어야 했다. 직접적으로 고통 받는 빈곤층을 찍는 게 아니라, 화면을 돌려서 재현의 윤리에 맞게 찍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고통을 확대하는 영화적 효과도 더 크다. 그러나 봉준호는 이러한 폭력적인 카메라 시선을 도구로 활용하여, 고착화된 계급 분화와 불평등을 지독하게 보여주었다.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그 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절대 넘을 수 없는 계급의 벽이라는 점을 관객에게 다시금 고통스럽게 상기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벙커에서 살아가는 근세의 모습도 추악한 모습으로 기이하게 묘사된다. 짐승과 같이 음식을 먹어치우는 모습, 머리에 피를 흘리는 광기를 보이면서까지 모스 부호에 집착하는 모습, 자신의 존재를 알고있지 않은 집주인 박사장에 대한 비이성적인 숭배, 다 쓴 콘돔을 정리하는 독특한 방식 등 카메라의 시선에서 담기는 하층민의 모습은 지극히 야만적이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박사장네 가족과 그들 주변 인물들은 (적어도 겉으로는) 교양이 넘친다. 부드럽고 상냥한 언어를 사용하며, 고급 음악을 향유하고, 지하철을 타는 일반 시민들에게서 나는 냄새를 절대 풍기지 않는 그런 선 위의 존재들이다.

 

이에 더해 박사장네 가족이 캠핑을 떠난 후, 기택의 가족이 그 집 거실에 둘러 앉아 양주를 훔쳐 먹는 대목에서도 재현의 윤리는 어긋난다. 기택은 사모님도 참 착해. 부잔데 착하다니까?’ 라고 말했고, 충숙은 부잔데 착한 게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야! 이 돈이 다 나한테 있어봐 내가 더 착하지.’라고 답한다. 이 대목에서 부자에 대한 비이성적 환상/돈에 대한 맹목/빈곤층의 악함과 비윤리성에 대한 정당화가 모두 나타나고 있다. 돈이 없는 빈곤층이기 때문에 착하지 않다는 것은, 자신들의 사기와 협박 그리고 살인까지도 모두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에 <기생충>에서 비윤리적인 악역은 빈곤층이며, 오히려 상류층이 윤리적이고 선한 존재가 된다. 기우와 기정이 사기를 쳐도 기택은 계획이 있다며 그저 격려하는 무능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 또한 빈곤층의 윤리성과 도덕성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여기서 빈곤층은 향후 어떤 비윤리적인 행동도 취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각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출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너도 빈곤층이야? 너 혹시 방금 찔렸어? 너도 돈만 있어봐. 착했을 거야.”라는 일종의 불편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며, 그 대사에 양심이 찔리지 않는 관객이야 말로 자신이 빈곤층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만드는 패러독스적인 모멸감을 준다.

 

둘째로, <기생충>지역정치학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보편적인 세계의 계급 갈등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꼭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수직적 계급 구조와, 분화된 계급 간의 갈등이 주요 서사라는 점을 눈치 챌 수 있다. <기생충>21세기 한국에서 제작된 영화라는 어떤 특수한 지역성, 시대성, 역사적 맥락을 배제하고 그저 매끄러운 서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또 다른 영화를 예로 들어 보자. <살인의 추억>과 비교했을 때 <기생충>의 지역정치학의 배제는 더욱 아쉽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한국의 독재정권, 야간 방공 후련, 시위 진압 등의 시대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시대상은 한국에 살아보지 않는 이상 모르기 때문에, 외국인들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봉준호가 가진 제 3세계 지식인의 자의식을 포함한 것이다. 3세계 동양의 작은 나라 지식인으로서 할리우드를 따라할 수밖에 없지만 무조건 따라하기에는 양심이 찔리기 때문에, 그 이면에 한국의 지역정치학을 떠오르게 하는 것, 이것이 봉준호의 장점이었다. 그러나 <기생충>은 너무나 간단명료하고 깔끔하게 단절된 서사를 전달하기 때문에, 오히려 제 3세계 지식인의 자의식이 상실되었다. 물론 대만 카스테라가 유행했던 한국의 시대 상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긴 했지만, 이러한 소수의 특정 지점을 제외하고 <기생충>에서 봉준호 감독의 연출은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 어디서든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흔한 모습만을 담았다는 점이 아쉽다.

 

셋째, 한국과 서구 간의 우위관계가 나타나는 이유는 <기생충>에서의 봉준호 감독이 굉장히 반미주의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이전 영화들을 생각해보았을 때, 본래의 봉준호 감독은 꾸준한 열혈 반미주의자였다. 하지만 <기생충>에서 봉준호 감독은 애매하게 반미주의와 친미주의의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또다른 영화로 다시 비교해보자. <괴물>에서 봉준호 감독은 사건의 원흉, 제거되지 않는 그 원인이 미국임을 밝히고 있었고, 사내의 자살을 이끈 어떤 나쁜 질서가 미국이 만든 자본주의 질서임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기생충>에서는 오히려 은근한 친미주의적 시각을 들이민다. 다송이가 비오는 날 텐트에 들어가 있을 때, 연교는 미제 제품이라 텐트에 물이 들어갈리가 없다며 미국산을 칭송한다. 그리고 박사장네 가족은 영화 전반에 걸쳐 영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영어식 발음을 굴려가며 자신들의 계급적 지위가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기택네 가족보다 높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낸다. 한국 사회를 이끄는 재벌이, 결국 모방하는 것은 그 위에 있는 미국이라는 거대 사회인 것이다.봉준호 감독의 반미주의와 친미주의 간의 실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까지 서구의 우월성은 계속된다. 박사장네 가족이 떠난 후, 이 집에 새로 이사 온 식구가 독일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독일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권력이 있는 패권국가 혹은 우월한 서구라는 점에서 같은 선상에 둘 수 있다.) 이로써 벙커에 있던 기택은 외국인 가족의 발 밑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물론 기택의 대사에서 부동산 놈들이 머리가 좋더라.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을 꼬셔가지고 결국엔 집을 팔더라고라는 부분에서 독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된다. 이 부분이 일정 비하적 표현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 아무것도 모르는 서구는 기택의 위에서 박사장네 자본력과 맞먹는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자본력과 권력을 쥐고 있다. 이러한 설정들을 통합했을 때, <기생충>에서 나타나는 봉준호 감독의 연출을 완전한 친미주의라고 보기에는 애매하지만, <괴물>과 비교했을 때는 확실히 반미주의로서 미국을 철저히 까고 있지는 않다.

 

또한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의 이전 남성주의적 시각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 <기생충>에서 여전히 여성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며, 무딘 존재로 인식된다. 반면 남성은 능동적이고, 진취적이며, 예민한 존재로 묘사된다. 연교는 그저 심플하고 착한 무직자이자 낮에 할 일이 없을 때는 그저 잠을 자고, 문광은 가정 주부다. 반면 박사장은 여성 가정주부 문광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집에 늦게 들어올 때면 아내 연교의 보필을 받는 성공적인 사업가다. 또한 딸 다혜는 항상 가족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이 가족은 과거의 남아선호사상이 잔존한 듯, 막내 아들 다송의 비위를 맞추는 데에 급급하다. 다송이 짜빠구리를 먹지 않자, 연교는 박사장에게 먹을 건지 물어본 후에서야 자신이 먹었으며, 당연히 다혜에게는 먹을 건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냄새를 맡은 예리한 인물도 남성(박사장과 다송)이며, 여성(연교와 다혜)은 냄새에 둔한 존재다. 뿐만 아니라 박사장네 부부-사실상 이 호칭 자체도 지양해야 하는 부분이다. 구시대적 한국의 부부관을 공공히 하기 때문이다-의 대화에서도 아내보다 남편이 우위라는 듯한 표현이 등장한다. 윤기사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사건과 무관한 아내가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또한 연교는 가정주부 문광이 결핵이라는 사실이 남편 귀에 들어갔을 경우, 자신이 교수형 혹은 능지처참이라고 걱정한다. 연교가 잘못을 했다고 해도 아내가 왜 남편에게 벌을 받아야하는 존재인 것인가? 벌은 주로 국가가 범죄자에게 내리거나, 스승이 제자에게 내리는 것으로 일종의 수직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민혁이 기우에게 처음 과외를 넘겨 줄 때도, “귀엽지?”라며 가르치는 학생에 대한 외모 평가를 하고 있다. 봉준호는 여성의 외모가 남성에게 평가하도록 연출하고 있다. , 민혁은 학생의 성적을 올리는 데에 집중하기 보다, 학생을 귀여운 여성, 마음에 드는 이성, 언제가는 내 고백을 받아줄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성인 남성과 여고생의 뜬금 없는 스킨십도 봉준호 감독의 남성주의적 시각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앞선 모든 비판들을 종합했을 때, 결론적으로 <기생충>은 너무 뻔한 결과를 전달한다. 결국 사회의 계급 구조를 까고, 계급의 불이동성을 알려주는 영화인 것이다. 이전의 봉준호 감독 영화들은 훌륭했다. 이 점은 인정한다. 그 결말들이 다 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답이 없는 퀴즈가 제시되었고, <괴물>에서도 여전히 괴물을 만든 원인은 제거되지 않은 채 끝이 났으며, <마더>에서도 오인이 해소되지 않아 찝찝함을 남긴다. 하지만 <기생충>에서의 결말은 완벽하고 적나라하다. 박사장은 죽었으나 상류층의 삶은 계속될 것이고 문광, 근세, 기정은 죽었으나 빈곤층의 삶도 그대로 지속될 것이다. 특히나 생존 경쟁의 끝에서 패배자는 빈곤층일 수밖에 없다. 상류층은 그저 빈곤층의 혈투를 지켜볼 것이고, 조금의 피해를 입더라도 그들의 생존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하지만 빈곤층끼리의 혈투와 생존 경쟁의 결말은 죽음이다. 기택은 자신도 문광 부부처럼 빈곤층이지만, 박사장네 기생충은 아니라고 착각하며, 벙커에서 기생하며 살던 문광 부부를 하대했다. 그러나 종국에는 같은 처지가 되어 자신도 벙커에서 살게 된다. 문광 또한 기택 가족을 무식한 것들이라고 무시하고, 스스로는 남궁현자 수준의 예술가로 착각하지만 결국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패배자 빈곤층에 불과했다. 또한 근세는 박사장네 가족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기정을 죽였다. , 결국 상류층은 큰 피해 없이 살아가지만 복수와 혈투로 피범벅 된 생존 경쟁의 최종 패배자는 빈곤층 사이의 전투에서 패배한 또다른 빈곤층이라는 것이다.

 

또한 인물들의 표정에서도 감정은 적나라하다. 관객인 우리가 인물들의 표정을 통해 추가적인 해석과 추론을 덧붙일 그 사유의 기회조차 마련해주지 않는 것이다. <마더>에서 관객은 엄마를 통해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 한다. 엄마의 표정은 지워져서 텅 빈, 해석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봉준호 감독은 <마더>에서는 엄마의 표정을 '그리면서 지우고 있다.' 하지만 <기생충>에서는 선을 넘어오는 느낌을 받을 때의 불쾌한 박사장의 표정, 빈곤층의 냄새를 맡고 괴로워하는 박사장의 표정, 그리고 이를 지켜보고 분노하는 기택의 표정까지 모두 명확하게 드러나고, 모든 관객들은 그 순간에 헷갈릴 여지가 없는 완벽한 해석을 할 수 있어 딱 사유의 종점이 거기에서 머무르게 된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그 이상의 것을 전달하려는 감춰진 의도가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관객들은 통일된 사유를 하고, 일관된 대답을 한다. 감독의 의도가 어떻게 되든 간에, 관객의 역할인 영화적 추론과 사유의 다양성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생충>에서 찝찝하게 해결되지 않은 부분은 없다. 그렇다면 <기생충>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곱씹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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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소현
씨네리와인드 미디어본부 객원취재팀 기자단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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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2021.12.0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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